맹사성이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을 때였다.
태종의 부마인 조대림이 목인해와 결탁하여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는 고변(告變)이 전해졌다.
이에 맹사성은 태종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지평 박안신과 함께 두 사람을 잡아다가 심문하였다.
태종이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였다.
더구나 심문과정에서 고문까지 행해졌다는 사실을 안 태종은 맹사성과 박안신을 붙잡아 그 책임을 묻고자 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잔뜩 화가 치민 태종은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저 두 놈을 저잣거리로 끌고 나가 달구지로 찢어 죽이라!"
이윽고 두 사람은 저잣거리로 끌려나가 죽을 운명에 처하였다.
거리에 두 사람을 능지처참할 소달구지까지 나타나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소달구지가 나타나자 맹사성은 너무 놀라 말문을 열지 못하였는데 박안신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맹사성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사성아, 너는 나의 상관이요, 나는 그 밑에 있는 사람이지만 이제 죽을 죄인이 되었으니 어찌 높고 낮은 직위를 따지겠는가? 나는 일찍이 그대가 지조 있는 인물이라 여겼는데 어찌 오늘은 이렇게도 겁을 내는가? 그대는 저 수레 구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러면서 박안신은 곁에 있던 나졸을 불렀다.
나졸이 다가가자 박안신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땅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기와조각을 가져오너라."
나졸이 듣지 않자 박안신은 두 눈을 부릅뜨고 꾸짖었다.
"네가 만약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반드시 너에게 화를 미치겠노라."
나졸이 두려워하며 마침내 기와조각을 가져다주웠다.
박안신은 기와조각을 받아들더니 곧 시를 지어 기와조각에 쓰기 시작했다.
천년이 흐르면 황하의 물도 웅당 맑아지거늘
나라님이 스스로 성군(聖君)이라 일컫네.
직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죽음은 달게 받겠으나
바른 말을 하는 선비를 죽인 임금의 이름이 후세에 남을까 두렵네.
시를 쓴 박안신은 나졸에게 기와조각을 건네주며 말했다.
"속히 가서 임금께 보여라!"
나졸이 황급히 대궐로 달려가 기와조각을 바쳤다. 이때 좌의정 성석린이 맹사성과 박안신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성석린은 그때 병을 앓고 있었으나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급히 대궐로 향했다.
성석린이 설득하자 마침내 태종은 두 사람을 용서하고 죽이지 않았다.
훗날 서거정은 박안신이 쓴 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이르기를 "시는 사람을 궁하게 만들 수도 있도 출세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했는데, 나는 "시는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고 말하겠다."
박안신(朴安臣)
1369년(공민왕18) ~ 1447년(세종29)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초명은 안신(安信), 자는 백충(伯忠)이다.
1393년(태조2) 생원이 되고, 1399년(정종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으로 등용되었다.
1408년 사간원 좌정언(司諫院 左正言)이 되어 대사헌 맹사성과 함께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과 목인해(睦仁海)의 모반사건을 왕에게 알리지 않고 처리하다가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그가 옥중에서 쓴 시가 태종의 마음을 갑동시키고 황의, 하륜, 권근, 성석린등의 무마로 유배를 떠나는 데 그쳤다.
그후 집의(執義),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등을 지내고 육조의 참판을 두루 거쳐 대사헌과 황해도 . 전라도 . 평안도의 관찰사등을 역임하였다.
또 벼슬이 올라 형조판서와 공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내고 1444년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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