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수(시인. 제3의 문학 주간) 지난 15일 포천중문의과대학교에서 개최된 이해조문학회 2월 모임에 제3의 문학 주간 안익수 회원이 발제한 동농 이해조 작품 ‘화세계’분석내용을 게재함으로써 동농의 문학을 이해함은 물론 포천시민의 자긍심 고취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편집자주)
꽃을 두고 어떤 까닭과 이유를 언어로서 풀어내 바느질하는 것은 햇살을 실타래에 감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인간은 반복된 습관과 학습을 통하여 꽃의 본성을 변질시켰으며 그로부터 더 큰 욕망이 충족되기를 요구해 왔다.
여러번 소설제목(「고목화」,「홍도화」,「옥중화」,「봉선화」,「화세계」,「연의각」등)으로 꽃 이름을 차용한 이해조의 꽃의 미학, 꽃의 아우라는 무엇인가?
꽃이 우리 인간사에 여성으로 상징됨은 아주 오래 전부터 보편화된 상식이다.
동농 이해조의 신소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꽃과 동행하여 개화기(계몽기)의 여성의 일상성(삶)을 수사한다.
꽃의 본질에 기대어 여성의 품격을 만들어 내며 이야기를 구성하여 소설을 완성시킨다.
언제나처럼 꽃의 미학은 바로 내면의 중심에서 잉태 발화되는 생명의 공명이며 예술의 근원으로 삼았다.
그것은 생명 탄생의 찬가이자 기원이 되기도 했다.
꽃을 노래함과 비유됨의 그 중심에는 깊은 율려와 절제의 응어리다. 이것이 인간의 생명문화와 공존하는 위대한 힘을 발산한다. 피는 것은 지는 것이며, 움직이지 않는 것은 섬이 된다라는 종교적으로 ‘생명의 윤회’와 ‘영원한 생명’을 웅변하고 있다.
그러한 꽃의 힘은 아침이며, 그 꽃은 햇살을 먹고 사는 생명을 말함이다.
그의 꽃 속에 심장은 늘 이성의 피를 받는다.
그가 돌리는 꽃의 물레방아는 달콤한 꿀맛을 짜기보다는 보리밭에 익은 달빛을 찧는다.
그의 꽃은 나비가 찾아 올 때 빗장을 풀고 벌이 날아 올 때는 문을 활짝 연다.
아니다. 그의 꽃은 맛보다는 향기며 향기보다는 가시덤풀 찔레다.
꽃이란 맛을 보거나 해석하려들면 결코 멍이 든다. 벌은 꽃의 물을 만들고, 그의 나비는 문을 따고 춤을 추며 살을 먹는다.
이것이 이해조가 탐독한 꽃의 품격이며 꽃의 가문이다.
바로 이해조의 꽃의 미학이며 아이러니다. 그의 작품은 꽃의 아우라로 사회 지배층이 민중을 부리거나 물물을 교묘한 틀 속에 가두어 거래하거나 그래서 이용당하고 짓밟히는 민초들의 함성이 결국 시대의 싹으로 일어서기를 희망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민주적 미명아래 부유하는 풍요속의 빈곤을 따지는 일이다. 소시민이 밟히고 일어서는 인간의 투쟁사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봉건적) 틀(패러다임)에 대한 해체이자 새 길에 새 집을 새 밥을 짓고자 하는 꽃의 고열현상을 말함이다.
그것은 꽃의 음모가 아니라 꽃의 성토인 것이다.
이처럼 이해조의 꽃이 상징하는 최고의 가치는 애정과 인간의 사회계약적 행복추구에 앞장서 치마를 입었으며, 사회적 모순율에 대한 인간과의 사랑이자 꽃(자연)과의 화해이다.
이것이 인간에너지의 원동력이 되며 나아가 자연과의 합리적인 품앗이는 아름다운 심포니가 된다.
이러함이 동농 이해조가 꽃을 통하여 추구한 예술적(소설적)탐구이자 미래다. 이것이 꽃의 미학이며 아우라다. 다음 이 깊은 꽃에 다시 긴 두레박을 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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