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조헌과 이발(李潑)은 서로 매우 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뒤에 피차 당을 달리하여 절교하였다. 이발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고 그의 어머니 윤씨도 잡히어 올라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헌은 윤씨를 찾아가 술을 권하고 털옷 한 벌을 바치니 윤씨가 감격하여 지하에 가서 아들을 만나면 이 일을 전하겠노라고 말하였다 한다. 이는 사소한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강한 의협심을 가진 그의 인간 됨을 전해주는 이야기다.
1591년(선조24)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에 갔던 통신사가 일본 사절과 함께 돌아오자 조헌은 옥천에서 상경, 대궐 앞에서 일본사신을 처단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비를 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본 왕은 조헌은 관망된 상소를 올리다가 귀양사리를 수차 하였는데도 아직 그치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하였다. 상소를 올린 후 3일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는 주춧돌에다 머리를 부딪쳐 얼굴에 피가 흘려 내렸다. 이를 본 사람들이 그를 말리면서 그 지나친 행동을 나무랐더니 그는 말하기를 조정에 좋지 않은 사람이 있어 성총(聖聰)을 흐리게 하여 국난에 대비를 못하니 명년에 난리가 나면 어떻게 할꼬! 명년에는 산 속에서 숨어야 할 것이니 그 때는 내 말이 생각 날 것이다 하여 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다.
그런데 과연 1592년(선조25) 4월 풍신수길은 가등청정(加藤淸正), 소서행장(小西行長)등을 보내 조선을 침략하였던 것이다.
그 해 4월 20일 상륙한 왜군은 동래를 침략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조헌은 어머니를 청주로 피난시키고 그의 문화생 김절(金節), 김약(金約), 박충검(朴忠檢)등과 함께 향병(鄕兵) 수백 명을 모아 보은에서 차령(車嶺)을 넘어 우선 적의 진로를 막았다. 그러나 조정에서 보낸 이일(李鎰) 장군은 상주에서 패하자 적병은 문경 새재를 넘어 무인지경은 달리듯이 진격하였고 신립(申砬)이 또한 충주에서 패하므로 관군은 무너지고 왕은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에 조헌은 문화생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등과 의논하여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위기를 구하기로 하고 전국에 격문을 돌리니 나라를 구하려는 많은 장정들이 속속 그 막하에 며칠만에 1천여명이 모여들었다. 이 때 순찰사 윤선각(尹先覺)은 조헌 막하에 의병이 많이 모이는 것을 시기하여 방해공작을 하였다. 그러나 조헌의 구국청에 감동되어 이광윤(李光輪), 장덕익(張德益), 신난수(申蘭秀), 고경우(高擎宇), 노응탁 등이 부하를 이끌고 조헌 휘하에 찾아옴으로써 1600이라는 병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7월4일 공주에서 잔치를 벌여 군사들을 위로하고 출정식을 가졌다. 조헌은 다음과 같은 훈시를 하였다. ‘민폐를 끼치지 말고 적병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직 국난만을 생각하고 오직 진격만을 생각하라, 공명심을 누르고 오직 의로움만을 생각하라.’
조헌이 이끄는 의병이 최초로 왜군과 싸운 것은 8월1일 청주 전투였다. 청주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군의 군세는 대단하였다. 장차 충청도 일대를 침략할 기세였다. 방어사 이옥(李沃),윤정기(尹庭祺)등이 공격하였으나 모두 패하고 승병장(僧兵將) 영규(靈圭)의 군사만이 왜병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헌은 이옥의 남은 군사와 영규의 군사와 합세하여 왜군 진지를 급습 왜군을 대파하여 청주에서 왜군을 쫓아내고 청주를 수복하였다.
청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것은 조헌의 고결한 인격과 터럭 끝만큼도 사사로움이 없는 충의심(忠義心)에 모두 감복하여 생명을 걸고 용감히 싸운 데서 얻어진 빛나는 승리였다.
이 땅이 나의 죽을 곳
한편 의주로 옮긴 조정에서는 조헌의 활약상을 듣고 그에게 봉상사(奉常寺) 첨정(僉正)의 벼슬을 내리고 공을 표창하는 교서를 보냈으나 그는 이것을 받기 전에 금산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조헌은 임금이 피난해 있는 북쪽으로 의병을 거느리고 가려 하였으나 왜적들이 금산에 웅크리고 있음을 알고 그 무리를 먼저 무찔러 없애려고 결심하고 영규의 군사와 연합하고 호남 순찰사 권율과도 연락하여 총 공격을 하기로 하였다.
약속한 날 조헌은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맹세한 700명의 군사를 지휘하여 금산으로 진군하였다. 그 때 권율은 기일을 연기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글이 도착하기 전에 조헌의 군사는 이미 금산 가까이 이르렀던 것이다. 이를 본 적군은 조헌의 군사가 미쳐 싸울 준비도 하기 전에 공격해 왔다.
조헌은 의병대에게 다만 죽음만을 각오하고 물러서지 말 것을 훈시한 후 진두에서 독전하며 적을 맞아 싸웠다.
화살은 다해가고 날은 저물고 적병은 기세가 꺾이지 않게 되자 조헌은 이때야말로 사나이 나라의 어려움을 당하여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 할 것이 아니라 오늘 이곳이야말로 내 목숨을 다할 곳이라고 굳게 결심하고 칠백 의사들을 격려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장렬 처절한 싸움을 벌이다가 한사람 남지 않고 깨끗이 목숨을 바치었다. 이 때 조헌의 나이 마흔 아홉이었다.
어려서는 유달리 침착하고 착한 소년이었으며 관계에 진출한 후에는 곧은 성격과 남다른 우국심으로 수차에 걸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이 때문에 여러번 귀양살이를 한 그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이 되어 기개를 마음대로 펴 보였던 조헌은 마침내 금산벌에서 49세를 일기로 장렬한 죽음을 하였던 것이다.
“금산의 칠백의총”은 만 오천의 짐승때 같은 왜적들과 맞서서 겨우 700의 적은 수효로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 쓰러진 모두 나라의 슬기롭고 의롭고 장한 칠백의사의 시신을 하나로 모아 하나의 유택에 모신 곳이다.
조헌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무원종(宣武原從)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고 유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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