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正朝 9년(1785)에 出生했으니 이 분이 바로 哲宗의 生父이다. 恩彦君 의 아들이며 의 아버지는 思悼世子(뒤에 莊憲世子로 追尊)이다. 恩彦君의 兄이 正朝인데 王族으로 江華島로 귀양을 가서 나무꾼이 되었으니 人生無常이라고나 할까.
江華 도령은 아들 5兄弟가 있었는데 둘째, 셋째는 일찍 죽고, 큰 아들 常溪君과 넷째 아들 豊溪君(뒤에 思全君으로 入養), 다섯째 아들이 全溪大院君이다.
어릴 적부터 天性이 仁厚하고 孝誠과 友愛가 극진했다. 恩彦君이 江華에서 귀양살이 할 때의 일이다. 洪水가 범람하여서 물이 집안으로 밀려들었다. 大院君은 울면서 여러 兄들을 구해낼 것을 호소했다. 어린 나이에 도량이 이만큼 컸음을 알 수가 있다.
특히 王孫으로 섬에 귀양살이 하는 恩彦君과 그의 母親을 위로하기 위해 항상 곁을 떠나지 않고 즐겁게 해드렸다. 正宗이 昇遐했다는 소식을 듣고 恩彦君은 “마땅히 大人(正祖)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늙으신 慈親(貞慶宮 洪氏는 正祖와 恩彦君이 같은 兄弟이므로 모두 慈親이 됨)이 아직도 堂上에 계시니 감히 가서 뵙지도 못한 지 이제 15년, 홀로 어머니가 자식을 근심하시는 情理를 생각하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하고 통곡했다.
純祖 元年(1801)의 禍厄이 兄弟들에게 圍籬安置되는 律이 適用되었다.
仲兄은 몸이 重病에 걸려 있는 데도 看護할 사람이 없으므로 大院君은 곁에서 극진히 간호했다.
全溪大院君은 아들 3兄弟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이 懷平君 明이고, 둘째 아들이 永平君 景應, 셋째 아들이(뒤에 哲宗으로 王位에 올랐다) 哲宗이다.
正祖가 24年間 王位에 있다가 昇遐하자 그의 둘째 아들인 純祖가 王位를 이었는데 34년 후에 純祖가 또한 昇遐하자 그의 孫子인 憲宗(당시 7歲)으로 하여금 王位를 계승하도록 했다.
15년 뒤에 憲宗이 昇遐하자 王位를 이을 後繼者가 없어 결국 全溪大院君의 셋째 아들인 강화도령을 王位에 오르게 하니 이분이 바로 哲宗이다.
哲宗이 王位에 오를 때(1850)는 벌써 全溪大院君이 世上을 떠난 뒤이다. 己酉年 6月 9日 哲宗은 大王大妃의 뜻을 받들어 大統을 入承하여 宗廟社稷과 백성의 主人이 되었다. 그리고 相臣과 禮官에게 諮問하여 生家 아버지를 全溪大院君으로 追封하였으니 이는 故事에 따른 것이고, 그 외 朝鮮組의 德興大院君과 같이 조금이라도 분수에 넘치는 일이 없었다. 또 墓所를 修築하도록 해서 이듬해인 元年에 竣工을 했다.
全溪大院君은 哲宗 7년(1841) 11월 2일 別世하니 나이 57세였다. 처음에는 楊洲郡 神穴面 율0에 恩彦君 墓側에 安葬하였다가 哲宗 7년(1856) 3월26일 抱川市 仙壇洞 王方山 아래로 移葬했다. 神道碑銘은 弘文館大提學 趙斗淳이 王命을 받고 擇했다. 墓碣?은 中樞府事 金左根이 擇했고 領敦寧府事 金汶根이 썼다.
이곳 抱川 仙檀洞에는 全溪大院君墓를 비롯하여 그의 두 아들 懷平君과 永平君 墓가 있고, 이어서 淸安君 李載純墓와 그의 曾孫 豊善君 李漢鎔 墓가 있다.
 최 종 규 포천명유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