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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선비정신·16]역사의 라이벌 최명길과 김상헌의 관계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1570년(선조3)∼1652년(효종3)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5년 12월 01일


리 효 종
포천한시사 대표


정묘호란의 난국에서 주화론과 척화론으로 극명하게 대립했던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과 청음 김상헌, 그들은 17세기 최대의 라이벌이었다.

모두 서인 계열로 처음엔 비슷한 길을 걸었다.

광해군 말기 최명길은 현실문제에 적극적인 양명학(陽明學)에 빠졌고 김상헌은 명분과 의리를 숭상하는 주자학(朱子學)에 몰두하면서 서서히 다른 길로 접어 들었다. 그러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기로 이들은 정치노선의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최명길은 반정에 참여해 공신이 됐고 김상헌은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어 서인이 세력을 얻자 이들은 탈 없이 성장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정묘호란은 그들을 결정적으로 갈라놓게 된다. 최명길은 주화를, 김상헌은 척화를 주장했던 것이다. 당시 절해고도와도 같았던 남한산성에서 최명길은 항복문서를 만들어 청군 진영을 오갈 무렵, 김상헌은 그 항복문서를 빼앗아 찢어버렸고 최명길은 그것을 주어서 다시 붙었다.

최명길은 갖은 모략과 위험 속에서도 전쟁 종식만이 나라를 살릴 수 있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내놓았고 김상헌은 대의명분이 무너지면 나라도 망한다는 신념으로 임금 앞에 엎드려 6일동안 단식을 하면서 목숨을 내 놓았다. 당시 최명길은 예조판서, 김상헌은 이조판서였다.

지리한 전쟁이 끝나고 안동으로 낙향한 김상헌은 좌절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최명길은 서울로 돌아와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최명길은 전후 처리를 위해 청나라에 드나들었고 김상헌은 척화파였다는 이유로 청나라 심양에 잡혀갔다. 그러나 얼마 후 최명길도 청나라 복수계획을 꾸민다해서 역시 붙잡히는 신세가 됐다. 역사의 라이벌, 그들은 차가운 이역 땅에서 포로의 몸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이 만남은 그들에게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명길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김상헌의 의연함에 탄복했고, 김상헌도 최명길의 주화론이 진정 나라를 위한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김상헌은 “두 세대의 좋은 우정을 찾고/ 백년묵은 의심이 풀리도다”라고 읊었고 최명길도 “그대 마음 돌 같아 끝내 돌리기 어렵고/나의 도는 고리 같아 때에 따라 돌고 도는 구나”라며 김상헌의 절의를 칭송했다. 또한 최명길의 아들은 재물을 갖고 심양에 들어가 아버지를 위해 쓰면서 아울러 김상헌의 죄를 덜어주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고 한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믿는 사이로 변해 간 것이다.

드디어 이들이 풀려나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올 때 청나라는 두 사람에게 청 황제가 있는 쪽을 향해 절을 하라고 강요했다. 최명길은 서슴없이 절을 했고 김상헌은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절을 하지 않았다.

서로 화해 했지만 변하지 않은 두 사람의 성격 차이를 다시 한번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같았다. 이들은 귀국 후 모두 재상이 되어 조국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각기 명암이 달라졌다. 최명길의 후손들은 소론이 되어 정치적 힘을 상실한 채 강화도에서 양명학파를 형성, 외로운 길을 갔다. 반면 김상헌의 후손은 노론이 되어 세력을 잡고 훗날 안동김씨의 권세까지 누렸으니 이는 조선이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한 사회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상헌의 형 상용(尙容 우의정)은 병자호란때 왕자 비빈을 강화도에서 호위하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순절하였고 상헌의 손자 수항(壽恒), 수증(壽增) 증손 창집(昌集)은 영의정으로서 의(義)를 지켜며 나라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를 시기하는 반대당(소론)의 김일경 목호룡의 모함으로 삼대가 참화를 당하는 비극도 겪었다. 그러나 정의는 승리하는 것, 그 후 모함이 밝혀져 신원 되었다. 적선지가에 필유유경이라 하였다.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인 종묘묘정(宗廟廟廷) 공신이 네 사람 효종묘정에 상헌 현종묘정에 수항 영조묘정에 창집 정조묘정에 조순(祖淳)이 배향되었고 또한 일묘사충(一廟四忠)이 탄생하였는데 조선조 500년 통틀어 유일한 사례이다. 즉 국가에서 수항 창집 제계 성행 4대의 충절을 현창하여 명부조의 은전을 내린 것이다. 한사람의 불천위(不遷位)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거늘 청음 가문에는 직계로 4대가 불천위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일이다.

조선조 말 안동김씨 70년 세도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선조 들의 후광일 것이다.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5년 12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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