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9월1일 영등포 우체국 행정서기로 발령 받아 1963년3월31일 청평우체국, 1968년5월3일 제109군사우체국장 취임, 1969년4월23일 가평군 조종우체국장, 1969년11월15일 송우우체국장으로 취임하여 1988년12월30일 정년퇴임 할 때까지 근무한 장병수(75·포천시 소흘읍 송우리 개나리아파트)옹을 만났다.
장 옹은 개성이 고향이며 1949년6월13일 1사단 11연대에 자원입대하여 1958년3월1일 제98육군병원에서 일등상사로 명예제대한 상이용사다. 이 시기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장 옹은 1953년1월21일 연천 서북방 지금의 태풍전망대 앞 베티고개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 중 박격포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 제98육군병원으로 후송돼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다.
그러나 전역 후에도 장 옹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1961년 영등포 우체국 행정서기로 발령 받았다. 가평을 거쳐 송우우체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주변의 땅을 평당 130원에 1필지, 평당 90원에 1필지 등 2필지 3천여평을 매입해 ‘재활농장’이라고 간판을 걸고 정원수 등을 가꾸었다. 세월이 흘러 재활농장은 도시개발로 평당 130원하던 땅은 평당 200만원, 평당 90원하던 땅은 30만원 등의 토지보상을 받아 2남1녀의 자식들에게 똑같이 나눠줬다고 한다.
국가의 중요한 대소사를 담은 신문기사를 스크랩하여 증거로 삼는 것을 취미로 하고 있는 장옹은 “남에게 피해 안주고 내 힘으로”를 좌우명으로 삼아 열심히 노력해왔다고 한다.
장 옹은 하나님께서 주신 목숨 이란 뜻의 ‘天壽’, 천주교의 세례명 ‘야고보’라는 이름도 있다고 소개한다. 장 옹은 육군병원에 있을 때도 환자들에게 노래와 간증을 했다. 이때 ‘몸은 비록 불구지만 마음은 불구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환자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장 옹은 송우우체국장 재직시절에 동네에 자주 나가 농삿일에 바쁜 주민들에게 막걸리를 대접했는데 이때 주민들은 “우체국장이 막걸리를 받아주었다”며 기뻐하기도 했다고 한다.
장 옹은 요즘 세대들에게 “기죽지 말고 열심히 살기를 부탁한다”며 “너무 편하게만 살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개미와 같이 일해야 한다. 성경에도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했다.
장 옹은 신부와 수녀처럼 혼자 살겠다는 결심을 했으나 사상계 사장인 장준하씨의 부친 장석인 목사의 소개로 부산에서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장 옹은 화랑무공훈장(1951.7.20) 수상, 자활모범 원호처장 표창(1972.6.9), 새마을 모범 국무총리 표창(1976.6.3), 제5회 경기원호대상 수상(1977.6.23), 20년 근속체신부장관 표창(1981.4.22), 대통령표창(정년퇴임시 1988.12.30), 제16회 한국보훈대상 수상(1989.6.13)의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장 옹은 전쟁 미체험세대에게 당부한다. “자유란 거져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쟁취하고자 하는 굳은 신념과 비싼 대가를 치루어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평화를 바라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는 격언과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그 잘못을 되풀이 하는 벌을 받게 된다는 역사적 경구로서 6.25의 쓰라린 교훈을 결코 잊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포천신문 구독료를 납부하고 있다는 장 옹은 시민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면 큰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장 옹은 또 그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