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퓨전(fusion)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어느새 우리는 생활 속에 깊숙이 스며든 퓨전이란는 문화현상에 익숙해져 있다. 퓨전 스타일의 시각적 청각적 미각적 변화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퓨전음악, 퓨전가수, 퓨전의상, 퓨전음식, 퓨전가구, 퓨전광고 등은 물론 퓨전정치인이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다.
퓨전의 어원은 라틴어의 fuse(섞다)라는 뜻으로, 이것이 영어식으로 명사화되어 ‘fusion(퓨전)’이란 말이 생겨난 것으로서, 두개 이상의 것들이 만나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전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이다.
나름대로 다른 각도로 풀이하면 무한한 도전과 실험정신, 새로운 물결, 새로운 상품의 마인드를 의미하기도 하며, 새로운 문화의 고갈에서 비롯되는 사람들의 욕구불만에 의해 탄생한 21세기의 유물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상 퓨전은 언제 어디서나 있어왔다.
누구도 고립되어 살 수 없기에 어차피 다른 것과 섞여 살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가 쓰는 말에도, 심지어 단일민족을 부르짖는 우리의 핏줄에도 이방의 것이 섞여 있다고 본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섞임, 즉 퓨전은 간음과 타락, 불순, 잡종 족속의 본질적 속성으로 비하되어 왔다. 순수를 동경하고 장려하는 반면에, 섞임을 마치 바이러스의 침투 마냥 배척하고 두려워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섞임은 곧 변화를 자아내고 그 변화의 끝이 무엇인지 몰라 늘 두려웠고 차라리 변화를 거부하면 현 상태를 유지하여 안온한 삶이 보장될 것이라는 보수적 성향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퓨전의 유리성을 인식하여 이질적인 것을 효과적으로 결합, 다른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 같다.
중국에서 건너온 청자기술에 상감기법이라는 우리의 독창적 기술을 접목하여 중국의 청자와는 다른 더욱 뛰어난 고고한 품격을 지닌 고려청자를 만들어 내었다.
또한 14세기 무렵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총명함과 아름다운 자태로 황후의 자리에 오른 기황후와 권문세가의 귀부인이 된 고려의 여인들은 고려의 의상과 음식에 대륙의 것을 혼합하여 새로운 고려의 퓨전의상과 음식을 크게 유행시켰다.
조선시대에도 중국의 화포 원천기술을 우리 고유의 화포기술에 절묘하게 조합하여 ‘천자총통’ 등 성능이 우수한 독창적 화포기구를 만들었으며, 거북선과 더불어 이 화포기구로 인하여 일본의 조총으로 위기에 빠졌던 임진왜란을 결국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의 IT 인재들은 선조들의 독창성에 빌게이츠로 대표되는 미국의 ‘창의성’과 한 가지의 기술을 대를 이어 발전시키는 일본의 ‘장인정신’을 효과적으로 결합하여 우리만의 창조적이면서도 독특한 IT산업을 이끌어 가고 있다. 최첨단 메모리에 로직과 소프트웨어까지 하나의 칩으로 구현한 ‘퓨전 반도체’와 디지털 기기에도 접목한 ‘퓨전 디지털 컨버전스’도 있다.
이제는 정보기술(IT) 뿐 아니라 생명공학기술(BT), 나노기술(NT), 환경기술(ET)의 영역에도 발 빠르게 퓨전의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에 있어서 ‘퓨전(fusion)’은 모든 분야에 경쟁력을 좌우할 주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특히 경제상황이 바닥을 치고 있는 불경기의 어려운 시기에 있어서는 ‘퓨전’의 이로운 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선조들의 창조적 응용능력을 기반으로 의상, 음식, 경제, 예술, 의학, 과학, 환경 등 모든 분야에서 고유의 기능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퓨전화하여 세계로 진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