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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선비정신 14]의리와 명분으로 나라 자존 지킨 원칙주의자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년(선조3) ∼1652년(효종3)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5년 11월 11일

한사람의 생애에서 전쟁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청음 김상헌은 일생동안 두 번이나 전쟁을 겪었다. 그의 나이 스믈세살때부터 7년간이나 계속된 임진왜란과 예순일곱살때인 1636년 발발한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이 두차례의 전쟁은 동아시아의 질서를 바꾸어 놓은 세계대전이었다.

병자호란은 특히 김상헌이 대신의 반열에 올라 정국의 주도자로서 치러야 했던 전쟁인 만큼 힘겨우면서도 그의 능력이나 개성이 남김없이 발휘되는 계기가 되었다.

1623년 일어난 인조반정은 율곡학파를 모집단으로 하는 서인이 주도하고 퇴계학파의 남인이 동의하여 일으킨 정변이었다. 광해군 시대의 북인정권은 시세에 따라 향배(向背)를 달리하고 관망하는 실리의 외교를 폈다.

이에 비하여 반정 이후 신정부는 순정 성리학도 답게 명나라가 임진왜란때 도와준 재조지은(再造之恩 : 거의 멸망한 것을 구원하여 도와 준 은혜)을 들어 명에 의리를 지키고 문화능력이 결여된 무법자로 국제질서를 교란하는 청나라에 반대의 기치를 분명히 하였다.

그는 반정에 직접 가담하지 않고 초야에서 학문을 하던 사림(士林)으로 공신세력의 공서파(功西派)와 노선을 분립하여 집권당 안의 비판세력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명분사회이던 조선은 명분이 강한 사림만이 살아 남을 수 있었으므로 결국 공서파는 도태되고 청서파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1636년 청은 기존의 형제의 의리가 아니라 군신의 의리를 강요하며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명나라를 칠 목적으로 배후에서 동서진영을 구축하고 있던 조선을 우선 제압하려는 것이었다.

10여년전 정묘호란때부터 지식인 사회의 여론은 약탈을 일삼는 여진족 오랑캐와 화친할 수 없다는 원칙론인 척화론(斥和論)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어 그곳으로 피난하였던 대군, 비빈, 원손이 청에 잡여 가자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와 대신들 사이에서는 화친을 주장하는 현실론인 주화론(主和論)이 비등했다. 결국 국체의 상징인 왕이 남한산성에서 삼전도(三田渡)로 내려와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당하였고,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등 젊은 지사들이 속죄양이 되어 청으로 잡혀 갔다.

이때 예순일곱의 김상헌은 대표적인 척화대신으로 척화론의 중심인물이었다. 더구나 외교업무의 총책인 예조판서를 맡고 있었으므로 업무수행에 대한 직책감까지 겹쳐 그 누구보다도 치욕감이 심했을 것이다.

그는 전후 상소를 통해 청나라와의 대결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임을 지적하였다. 청나라를 적국으로 설정하고 있는 한 적극적으로 전쟁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그 정신력은 와신상담(臥薪嘗膽)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 사회에서 국가대의로 자리잡은 북벌론(北伐論)의 시초가 되었다. 평화적인 국제질서를 무력으로 와해시킨 청나라를 토벌하여 복수설치(復讐雪恥)하겠다는 북벌론은 상처받은 국민적 자부심의 회복운동으로 제기되어 조선후기 사회를 재건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그는 은퇴후에도 명나라를 칠테니 조선의 군대를 파병하라는 청의 요구에 반대하는 등 반청의 자세를 분명히 했다.

김상헌의 이러한 입장과 역할은 청나라에 알려져 1640년엔 청의 강력한 요구로 심양으로 끌러가게 되었다. 의주에 도착, 적장이 심문하며 여러 가지로 위협하고 회유하였지만 조금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심양에 가서도 여전했다. 그??나라 관원들도 그의 충절에 감탄하여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하며 조선 선비의 기개에 존경심을 보였다.

그는 1645년 일흔 여섯살에 심양에서 돌아와 좌의정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10여년의 인질생활을 하였던 효종이 1649년 즉위하자 북벌대의가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어 이 이념의 상징적 인물로 떠 받들어 진 그에게 대로(大老)라는 존칭이 내려졌다. 척화론의 주도자로 활약하면서 죽음도 불사하는 의지로 국론을 이끌었고 그의 형 김상용(金尙容)도 강화에서 순절하므로써 이들 형제는 조선후기 국가사업으로 계속된 애국지사 현창사업을 통해 대표적인 충신열사로 높이 평가 받았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1백년후에나 사람들이 알아 줄 것이라고 했다. 전쟁중에 살아남고 먹고 사는 것이 시급한 현실에서 국민의 정신력을 키우고 자존심을 세우려는 김상헌의 이상주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살아 생전에 왕으로부터 그 노선을 인정받고 응분의 예우를 받았다. 이는 그러한 가치에 동의하는 국민정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상헌은 현실론이 설득력을 갖고 있던 전란의 와중에서도 1백년후를 내다보며 조선사회의 기본방향을 설정하고 의리와 명분이라는 푯대를 높이 세운 참다운 조선의 선비였다.

<다음호에 계속>



리효종 포천한시사 대표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5년 1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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