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동면 유동리 275번지에서 태어나 일동초등학교, 포천중학교, 서울 마포고등학교, 건국대학교 정치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초대 포천군의회 의장직을 수행한 바르게살기운동 포천시협의회 이병업(65·사진·군내면 직두리) 회장은 “고등학교를 서울로 선택한 것은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생 집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회고한다.
무척이나 먹고 살기 힘든시절 경기도대학생봉사대 회장으로 옹진군에 봉사활동에 나섰다가 내가 가장 가난한 줄 알았는데 1962년 당시 밥 먹고 산다는 것만 해도 큰 행복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한다.
1964년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 생활을 하면서 봉급을 받은 것을 집으로 보냈더니 어머니께서 모아 두었다. 이 돈으로 우체국 1면 1국 제도시행으로 모든 면에 우체국이 있었는데 군내면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개설되지 않자 이 회장이 우체국을 개설하고 1968년 국장으로 취임한다.
우체국을 잘 운영하다가 지난 1991년 포천군의회 의원 선거에 군내면 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당시 민정당(집권당) 협의회장과 대결하여 당선되었는데 이때 당시 군내면 농민후계자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 이 회장은 농민후계자 모임의 명예회장직을 수행했다.
이 회장은 젊은 농민 후계자들의 도움으로 당선되어 젊은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했으며 의회 윤리강령 제정은 물론 순수한 열정으로 공부도 많이 했다.
포천군의회 1,2대 의원, 1대 의장(후반기), 1대 예산결산위원장, 1대 청원특위 위원장, 1대 결산검사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포천향토장학금지급조례를 최초로 제정하기도 했다. 어렵게 학교생활을 한 것이 큰 짐이 되어 후대들에게는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盡人事待天命’을 좌우명으로 삼아 노력한 결과 이 회장은 군내우체국이 전국 면단위 우체국중에서 1등을 3회나 차지하는 실적을 거양하기도 했다. 성실하게 남을 속이지 않고 주민을 王으로 쳐다보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져 있다.
이 회장은 선출직은 7~8년이면 충분히 그 능력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2회 이상 하면 안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 회장도 7년동안 선출직으로 활동하다가 미련없이 후배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현재 포천신문 자문위원으로 활동중인 이 회장은 포천신문 창간 때부터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비판기능을 강화시켜 쓴 소리를 자주 접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바르게살기운동은 진실, 질서, 화합의 정신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항상 봉사하는 단체로 남을 속이지 않고 진실 되게 살고 있다. 어렵더라도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회장은 역동하는 포천의 모습이 보기에 좋지만 지나치면 개구쟁이가 된다며 행사가 너무 많다고 지적한다. 포천시의회의 감시비판기능의 강화가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문화예술 분야의 발전도 좋지만 지금 당장 조각공원 설치가 그렇게 시급한 사안은 아닌 것 같다고 한다. 시급한 것은 43국도부터 넓히는 것이다. 출퇴근 시간 정체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43번 국도의 확포장공사가 적극 추진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포천군여성상 심사위원장, 평통위원(7년), 재단법인 경기개발연구원 이사, 법무부 갱생보호 포천군 위원장, 농업경영인 포천시 연합회 고문, 제2건국 포천군위원회 운영위원장, (사)바르게살기운동 포천시협의회장, 민주정의당 경기8지구당 부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수상실적으로는 재건국민운동 본부장 봉사상, 체신청장 표창3회, 체신처장관 표창(2회), 농협 중앙회장 표창, 평통사무총장 표창, 제1회 포천군문화상(지역개발부문), 대통령표창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