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정번호: 경기도기념물 제53호 ·지정년월일: 1976.8.27 ·시대: 1631년(인조9) ·소재지: 포천시 설운동 산 1-14 ·규모: 높이 1.5m, 둘레 14m(묘역 25m×56m) ·재료: 토분 및 석물 ·배향인물: 서성선생 아주 낮은 도로변 야산에 위치하고 있는 서성선생 묘는 곡담 양머리에 장방형의 화강석을 세워 장식한 후, 봉분을 중심으로 사괴석으로 돌렸고 봉분의 호석은 높고 둥글게 한 후 봉토하였다. 묘 전방에 묘비와 혼유석, 상석이 밀집하여 있다. 상석의 전면을 경계로 좌우곡장의 머리를 연결하고 상석 후면에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갖추어져 있다. 곡장과 호석, 봉분 앞의 묘비는 1968년 후손들이 신축 또는 보수한 것이다.
▶서성 1588(명종 13)~1631(인조9)
선생은 조선시대 문인으로 자는 현기, 호는 약봉, 본관은 달성이다. 사헌부 장령 팽소의 증손이며 예조참의 고의 손이고, 해의 자이다. 아버지 서해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어머니 고성이씨마저 맹인으로 숙부인 서엄에게 양육을 받으며 자랐으나 얼마 후 숙부마저 세상을 떠났다.
1586년(선조 19) 28세에 별시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권지성균관학유가 되었다. 그후 사관에 뽑히어 검열, 대교, 봉교가 되었다가 성균관 전적으로 옮기고 사헌부감으로 모든 어려운 일을 쉽사리 처리하니 동료들이 탄복하였다.
1592년(선조25) 왜적이 서울을 핍박하니 선조의 서행에 호소사 황정욱이 청하여 종사하였는데, 함경도에 이르러 정욱 등이 두 왕자(임해군·순화군)와 더불어 함께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 이때 서성이 홀로 계교를 써서 탈출하여 행재소에 이르러 군사를 일으키고 평사 정문부를 원조하여 연달아 적을 부수고 승첩을 거두었다.
경기감사를 배수받고 임기가 차서 돌아와 지중추가 되었다. 선조가 돌아가시니 산릉의 일을 감독하고 계급을 올리어 우참찬을 배수하였다. 조금있다가 산릉이 견고하지 못하다 해서 죄책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가 다음해에 서품되어 지중추로 돌아와서 병조판서와 참찬을 역임했다. 부대신으로 여러 도를 관찰하였다가 다음해 개성유수로 배수했다. 돌아와서 지중추가 되고 다시 참찬이 되었다. 이때에 감형의 옥사가 있었는데 서성에게 책임을 돌려 탈직되었다가 서품하여 지중추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에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서성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간당들이 모함하여 의금부에 체포되어 단양으로 귀양갔다. 다시 영해로 옮기었고 또 원주로 옮기었다. 유배생활을 11년 하면서도 용태를 바꾸지 아니하고 문을 닫고 주역을 읽었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후에 풀려나 형조판서로 제수되었다. 다음에 대사헌을 제수받고 경연과 성균관사를 겸하였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호종한 공로로 판중추로 특진하고 다시 형조판서로 옮기고 다시 판중추로 돌아왔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강화로 행행할 때 종묘를 받들고 수행하였다.
1628년(인조 6)에 반역옥사를 다스리시어 숭록대부를 더 받았고 다시 지중추가 되었다.
1631년(인조9) 4월18일에 병졸하였다. 호는 약봉인데 서울 약사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동명을 따서 약봉이라고 했다. 그는 학문을 즐겨서 이인기 이호민 이귀 등과 남지기로회를 조직하여 역학을 토론하였으며 서화에도 출중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약봉집이 있다. 시호는 충숙이다. 대구의 귀암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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