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의 기치를 높이 드신 면암 최익현 선생과
우국지사 염재 최면식 선생을 봉양하고 있는 사당

최면식(崔勉植)(1891∼1944)
선생은 면암 최익현의 현손으로 호는 염재, 자는 경소, 본관은 경주이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국외로 망명, 국권회복을 위해 수시로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및 무기조달에 전념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수차 옥고를 치렀다. 1916년 광복단 조직을 위해 기호지방에서 활동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 박상진, 노백린, 채기중 등과 우의를 다졌다. 선생은 독립운동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했다가 목포에서 체포되어, 2년여의 옥고를 치렀으나 이후 만주로 탈출하여 활약하였다. 1921년 재밀입국 했다가 광복단 사건으로 대전에서 체포되어, 무기수로서 공주형무소에서 복역중 형독악화로 출옥한 뒤 순국했다. 1977년 독립유공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그리고 1990년 12월26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채산사의 구성과 배치
채산사는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앞 뒤로 시야가 트이면서 들이 펼쳐져 있다. 뒤쪽 좌측 산기슭에 청성사가 있다.
구조는 화강암으로 축조된 장대석과 자연석으로 축조된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우와, 삼문이 있고, 주위는 자연석 막돌로 축조하고 기와를 올린 담장이 둘러 있다. 사우의 전면 중앙 추녀 밑에는 현판을 내걸었다. 채산사의 본전인 사우의 전면에는 각 칸마다 창방을 설치하고, 공간포가 없는 대신 2개의 소로가 각 칸의 장혀를 받치고 있다. 그 위에 굴도리를 설치하고 서까래를 얹어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형성하였다. 평주와 귀기둥머리의 보머리를 받친 익공은 초익공이며, 좌우측 벽에 방풍판을 달았다. 내부의 마루는 정자형이다. 안에는 마루를 깔고, 그 위에 자리를 펴두었다. 그리고 중간 도리 밑에 중문을 만들고, 중앙칸에는 4짝의 복합문을, 좌우측 문에는 두짝의 복합문을 달았다. 분합문 밖에 화강석으로 섬돌을 놓았다.
사우 안 쪽 중앙에는 면암 최익현선생의 위패가 중앙 북단에 남향하여 모셔져 있다. 그 좌측 곁에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면암선생이 73세때 그린 관복차림의 전신좌상이다. 규모는 가로 53cm, 세로 98cm 크기이다. 충남 청양군 정산현감으로 있던 채용신이 그렸다. 중앙 우측 상단에는 유림 안상섭이 지은 ‘첨배채산사’라는 시가 각자한 현판을 걸어 두었다.
염재 최면식선생의 영정 및 위패는 서단에 동향되어 모시었다. 염재선생의 영정은 석농 박영수 화백이 그렸다. 규모는 가로 54cm, 세로 92cm 크기이다. 한복차림의 전신좌상이다. 두 분의 영정은 각각 분합문을 달아서 훼손을 방치토록 하였다.
사당 주변에는 네모난 담을 쌓고 앞쪽에 외문을 내었다. 외문은 사당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사당의 중문과 마주보게 된다. 삼문담장으로 외부 공간과의 구획을 지어 분별하게 하였지만 담장의 높이는 높지 않게 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깨지 않고 적용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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