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령 자는 건중 호는 남명이며 지평 언형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7) 경상좌도 예안(경북 안동)에서 퇴계 이황이 태어나고 경상우도(경북 합천)에서는 남명 조식이 태어났다. 16세기 기호학파, 영남학파 형성기에 두 선비는 영남학파의 두 거봉으로 같은 해 태어났다. 퇴계가 경상좌도 영수라면 남명은 경상우도 영수이다.
남명은 일찍부터 강인한 의기를 지키고 심성을 수양하는 공부에 힘썼다. 자기 수양의 두가지 방법은 꿇어 앉아서 물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밤을 세우는 일과 허리에 방울을 차고 다니는 일이다. 그릇의 물이 흔들리지 않게 받쳐 들고 밤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뜻을 가다듬고 걸어 다닐 때마다 허리춤에서 나는 방울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의 뜻을 일깨우려는 것이었다. 또한 경의도라는 칼을 턱 앞에 받쳐두고 한 순간의 방심도 허락지 않는 경의 수양에 시종일관 매진하였다.
16세기는 사회적으로 성장한 사림과 기성 정치세력인 훈구파의 대립과 갈등 속에 연속적으로 사화가 발생한 시기이다. 한 세기에 걸쳐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귀족화한 훈구파와 사회개혁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사림파와의 격돌은 언제나 사림의 피를 흘리는 사화로 결말이 났다. 정권이 훈구파에게 넘어가면 사림의 일부는 희생되고 일부는 귀양가게 되어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키우면서 때를 기다리게 된다. 향촌 사회에서 때를 기다리던 사림이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 것은 중종 후반기에 이르러서이다.
퇴계는 1534년 3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서 사대부의 길을 걷게 되고 남명은 1539년 39세로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여 명망있는 학자로 인정받아 유일로 참봉벼슬이 내려왔으나 나가지 않았다.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온 당대 성리학의 석학인 회재 이언적이 그의 명망을 듣고 만나길 청했지만 그는 벼슬길에 나가있는 사람과 만날 뜻이 없다고 거절했다. 그 만큼 산림에 파묻혀 학문하는 고고한 선비로서 출처(出處-벼슬길을 통해 세상에 나서는 일과 물러서는 일)에 엄격한 지조를 지켰던 것이다.
1551년(명종6) 51세에 정6품직인 종부시 주부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1553년 53세에 다시 정6품의 벼슬을 내렸으나 역시 사양을 한다.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던 퇴계가 편지로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남명은 눈병을 핑계로 거절한다. 이때 퇴계와 남명이 주고받은 편지에서는 서로에게 보내는 애정과 존경의 정이 자못 절절하다. 퇴계는 유일로 임명한 벼슬이니 몸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며 남명에게 벼슬길에 나오기를 원했으나 남명은 하늘의 북두성처럼 우러러 사모하는 그대의 요청에 따를 수 없는 이유는 나의 경륜이 없고 식견이 무지몽매해서이다 라고 애정과 존경이 넘치는 편지로 거절했다.
1555년(명종10) 55세의 남명 조식에게 다시 벼슬이 내려졌다. 삼가(합천)에서 가까운 단성(산청)현감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라는 것도 아니고 이웃 고을의 현감을 하라는 것이니 이번에는 사양하지 못할 거라며 내린 벼슬이었지마는 사양하고 단성소라는 상소를 올리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상소문에서 ‘진실로 한마디의 말이라도 들어서 만에 하나 임금님의 덕화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면 구급이라는 두 글자로서 나라를 부흥시키는 한 마디로 삼겠습니다’라고 적었다. 말 한마디로 목숨을 날릴 수 있는 절대 군주 앞에 일개 처사에 불과한 남명이 당당하게 말하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