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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획]우리고을 포천의 문화유적 ⑬-채산사·上

위정척사의 기치를 높이 드신 면암 최익현 선생과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5년 09월 30일


최 종 규
포천명유회 회장



-지정번호: 경기도기념물 제30호
-지정년월일: 1976.8.27
-시대: 조선말기
-소재지: 신북면 가채리 678
-재료: 목조와즙
-배향인물: 최익현, 최면식


(1) 연혁

채산사는 신북면 가채리에 있다. 구한말의 학자 면암 최익현 선생과 우국지사 염재 최면식 선생을 봉향하고 있는 사당이다. 본래 채산사는 면암 최익현선생만 봉향해 왔다.

1906년 면암선생이 대마도에서 순국하자 유림들이 그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처음으로 건립하였으나, 1920년 일본군에 의해 훼철되었다. 이후 1935년에 재건하였으나, 다시 1943년에 일본인에 의해 훼철되었다.

해방이후 1949년에 이르러 복원하고 위패와 영정을 봉안해 왔으며 퇴락한 것을 1975년에 해체하여 다시 복원하였다. 이어 1986년에는 포천 유림의 뜻으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한 염재 최면식 선생을 서향하여 종배하였으며, 위패와 영정을 함께 봉안하였다. 현재 채산사의 향사는 매년 음 9월15일 정하여 행한다. 매월 삭일(1일)에는 당직이 분향한다.


(2) 배향인물

-최익현(崔益鉉) 1883(순조33)~1906

구한말 문신이며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포천현 내북면 가채리(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찬겸, 호는 면암, 본관은 경주이다. 의병부 참정 대의 자이며 화서 이항로의 문인이다.

어릴때부터 골격이 비범하고 안광이 빛나 부모의 사랑을 받았으며 4세때 가세가 기울어져 충북 단양으로 아버지를 따라 이주했다. 6세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총명함을 보였으며 수차례에 걸친 이우(移寓)의 불운을 겪으면서도 면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승인 이항로가 역설한 ‘애군여부 애국여가(愛君如父 愛國如家)’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바탕으로 위정척사사상을 이루었다.

1846년(현종12) 화서의 문하로 들어가 스승의 잡저인 『설문습록』을 필사하는 등 수제자로 스승의 촉망을 한몸에 받으면서 『격몽요결』, 『대학장구』, 『논어집주』등을 수학하여 성리학의 기초를 습득했고 스승의 아들인 이준·이복 과 임규직·김평묵·박경수·유중교 등 동문의 선비들과 면학 궁리에 열중, 학문에 큰 진전을 보여 동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화서의 문하를 떠날 때 스승으로부터 받은 ‘면암(勉菴)’두 글자는 이후 아호로 통용되었다. 22세때 다시 포천으로 이사했다.

이듬해인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 해 6월 승문원부정자로 임명되고 성균관전적을 거쳐 1857년(고종 2) 성균관직강으로 재직중에 모친상을 당해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탈상 후인 1868년(고종 5)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경복궁 토목공사로 인한 국민 부담의 가중과 당백전의 발행에 따른 재정의 파탄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였다.
이대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돈녕부도정으로 전직되었다가 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광릉 봉선사에서 독서하던 중 1870년(고종 7)승정원동부승지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양근 대곡으로 동문의 선비로 김평묵을 찾아가 혼란한 시국과 앞으로의 대처 방안을 상의한 뒤 1873년(고종10)에 올린 상소가 큰 파문을 일으켜 10년 집정의 대원군을 하야시키고 고종이 친정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해 『동인열전』을 편찬했고 고종의 신임을 받아 동부승지를 거쳐 호조참판에 특배되었다. 그러나 실권이 민비 일족에 의해 농단되자 관직을 사퇴하는 한편 공조참판으로 시폐의 시정을 재차 상소하였다. 그러나 1873년(고종10)에 올린 상소에서 대원군인 군부를 논박했다는 죄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1876년(고종13) 일본과의 통상이 논의되자 병자수호조약을 결사 반대하는 지부상소 즉 5조로 된 격렬한 척사소를 올린 끝에 다시 흑산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1879년(고종 16) 유배에서 풀려나 향리에 돌아온 뒤 이듬해 호군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설악산에 들어가 몇 달을 지내고 1887년(고종24) 부친상을 당하였다.

탈상 후인 1890년(고종 27) 『화서선생문집』전질을 영조와 함께 선사하는 등 지부상소 이후 약 20년동안 재야에서 학문에만 힘쓰면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1894년(고종31)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고 갑오경장으로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반대하다가 한때 투옥되기도 했다. 1898년(광무2) 의정부 찬정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임하고 12조의 시무책을 건의하여 국정을 바로잡을 것을 역설하였다.

이 해 궁내부 특진관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국내에 대소사건이 있을 때마다 죽음을 무릎쓰고 상소하였고, 배일과 매국역신의 토멸을 강력히 주장하여 여러 차례 체포·구금을 거듭하였다.

1900년 봄 호서지방 정산으로 이사했고, 이후 몇 년간 경주를 비롯하여 명산대천을 유림하면서 비문도 짓고, 족보를 보살피기도 했다. 1905년(광무5)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즉각 반대 상소를 올리는 한편, 의병을 일으킬 결의를 굳게 했다. 이듬해 4월 제자인 임병찬, 임낙 등 80여명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회맹하고 궐기할 것을 결의하고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일본의 배신 16조를 규탄하는 의거소략을 배포하였다.

의거에 호응하여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봉기하였고 자신도 순창에서 약 4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하고 임병찬 등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이해 7월 대마도의 경비대 감옥에 유폐되고 말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국왕에게 보내는 유소를 제자 임병찬에게 구술하게 하고 최후의 항거로서 옥중 단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쇠약해진 고령의 몸에도 불구하고 단식을 계속하던 끝에 옥사하였다.

학문적으로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스승 화서의 학통을 계승했으나 이기론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이론보다는 존왕양이와 춘추대의에 입각한 실천적인 위정척사운동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주기객설’,‘이수기졸설’을 주장하고 심설에 있어서는 화서의 입장에서 유중교의 심설을 비판하는데 그쳤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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