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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우리고을 포천의 문화유적⑫-이항복 선생 묘(李恒福 先生 墓)

임진왜란 후 병조판서로 병권잡고 크게 활약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5년 09월 21일


최 종 규
포천명유회 회장


-지정번호: 경기도 기념물 제24호
-지정년월일: 1975.9.5
-시대: 1618년(광해군 10)
-소재지: 가산면 금현리 산 4-2
-재료: 토분 및 석물




화산들 옆 작은 구릉 위에 부인 안동권씨 묘와 더불어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 앞에 묘비·상석·혼유석·망주석과 문인석 각 한 쌍이 갖추어져 있다. 선생은 1556년(명종11)~1618년(광해군10년). 어렸을때부터 총명하고 재질이 우수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조선시대의 문신으로서 가산면 금현리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호는 백사·필운·동강·청화진인·소운이고 본관은 경주이며 고려의 문하시중 이제현의 후손이고 성무의 증손, 예신의 손, 참찬 몽량의 자이다. 최륜의 외손이며 권율의 사위이다.

8세에 이미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아버지 몽량이 칼과 거문고를 주고 글을 지으라 하니 “칼은 장부의 기상이요 거문고는 천고의 소리를 간직했노라”하니 듣는 사람 모두가 큰 그릇이 될 줄 알았다. 또 성격이 활달해서 놀기를 좋아했고 장난이 심했는데 9세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커가면서 기골이 장대하여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1580년(선조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부정자를 거쳐 검열이 되었다. 당시 이이의 추전으로 이덕형과 함께 선조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그리하여 1587년(선조20) 사가독서를 차지하는 영예를 누렸으며, 저작·박사·전적·정언·수찬을 역임하고 1589년(선조22) 이조좌랑에 올랐다. 그해에 예조좌랑으로서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발생하자 왕명을 받들고 문사랑으로 입시하여 매우 복잡한 사건을 명쾌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1590년(선조23) 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되었으며 정여립 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 3등으로 책봉되었다. 이듬해 좌승지가 되었는데 재상인 정철을 위로한 게 화근이 되어 파직당하였다. 곧 복직되었으나 다시 비난이 심해 신분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대사헌 이원익의 도움으로 무사하게 되었으며 도승지로 승진하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하자 손수 촛불을 들고 앞장서서 피난길을 재촉하였다. 선조가 개성에 이르러 이조참의로 임명하였고 다시 왕명을 받들고 신성군, 정원군 두 왕자를 호위하여 평양으로 갔다. 선조는 다시 형조판서로 임명하였다가 대사헌으로 영전시켰으며 얼마 후에는 병조판서와 홍문관 직제학을 겸하게 하였다. 왜적의 기세가 꺽여지지 않고 계속 진공하여 대동강을 압박하게 되자 다시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옮겼다. 여기서 민심을 수습하고 또 대신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호남지방에서 군사를 모집하게 하였다. 이후 계속하여 지경연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좌빈객 등을 겸직하였으며, 명나라 지원군을 맞아 들였다. 1594년(선조 27) 병조판서와 주사대장을 겸직하였고 다음해 이조판서,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의금부사,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선조30)신병으로 인하여 잠시 직책에서 물러났다가 후에 다시 병조판서로 복직되었는데, 임진왜란 이래 5번이나 병조판서로 병권을 잡고 크게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7년의 국난을 당하는 동안 동분서주하면서 전쟁 국면을 타개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1598년(선조31)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춘추관사 오성부원군으로 임명되어 보국안민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으며 진주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9년(선조32) 좌의 다음해에 우의정에 전임되었고, 도원수로 도체찰사를 겸직하여 영남과 호남지방을 비롯한 여러지역을 순회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구휼에 힘썼다.

1600년(선조33) 영의정에 올랐으나 1602년(선조 35) 다시 재연된 붕당 싸움으로 인하여 자진해서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는 붕당 싸움에서 학식이 높은 성혼 같은 인물이 비난당하자 이를 변호하다가 규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604년(선조 37)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으나 사직하여 시기와 중상의 대상에서 모면할 수가 있었다. 선조가 승하한 이후에 새로 임명된 영의정 이원익을 도와 이덕형과 함께 좌·우의정을 담당하였다. 특히 이덕형과의 관계가 밀접하여 관직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국사를 처리했다. 그리하여 이항복은 오성으로 이덕형은 한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는데, 두 사람 사리에는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611년(광해군 3) 우의정이 되었으나 1613년(광해군 5) 역적의 괴수를 천거했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인하여 사직서를 올리고 은거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대두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1618년(광해군 10) 함경도 북청으로 귀향갔다. 1618년(광해군 10) 사망하고 그해에 바로 복관되고 청백리에 선출되었다.

포천의 화산서원, 북청의 노덕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이며 신도비문은 이정구가 지었고 김집이 썼다. 유고집으로 『백사집(白沙集)』, 『북청일기(北淸日記)』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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