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성(李宗城) (1692~1759)
영조대왕이 만년에 정순왕후로부터 후사를 이으려는 희망이 간절하여 회임에 도움이 되는 보약을 정순왕후에게 자주 올리도록 하였다.
정순왕후는 성덕이 있어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아기를 가지면 혹 세손(世孫:후에 정조)이 임금의 사랑을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몰래 약을 다른 곳에 버리고 들지 않았는데 주상은 실로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당시 영조가 문씨 성을 가진 후궁을 귀여워하고 있었는데 이 여인이 몰래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 할 계략으로 옷으로 배에 덧붙여 마치 아기를 밴 것처럼 꾸미고 아기를 가졌다고 드러내 놓고 말하였다. 그 산월이 되어 몰래 친족에게 부탁하여 민간의 갓 태어난 아이를 구하여 궁중에 들어오게 해서 자기가 낳은 것으로 말하려 하였으니 그 흉악한 음모는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한편 이종성이 고향인 장단의 오촌으로 가려 하다가 그 기미를 넌지시 살피고 대삿갓과 도롱이 차림으로 날마다 용산 강가에 가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루는 석양때 시골의 무부(武夫)가 이 곳을 지나다가 이종성이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것을 보고 옆에서 쉬고 있는 것이었다. 이종성이 물었다. ‘그대는 뉘시오’ 시골 무부가 대답하였다. ‘나는 아무골 사람인데 무과에 급제한지 10년이 다 되어도 아직까지 다리 뻗을 길이 없으므로 서울에 올라가서 벼슬을 구하려 합니다’이종성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데 저동 이 영부사(李가 領府事: 곧 이종성) 나라의 공권을 장악하였고 또 남을 구제하는 풍토가 있다하니 이번 걸음에 가거든 곧 바로 그 집을 찾아가서 그 하인을 찾아 용산강에서 고기 낚는 노인이 얘기해 보냈다고 말하면 반드시 유숙시켜 줄 것이고 또 출세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하였다. 그 사람이 기뻐하며 사례하고 곧바로 저동으로 들어가서 그 노인의 말대로 전하니 모든 것이 조그도 틀림없었다. 해가 저문뒤에 이종성이 집에 돌아와서 그 사람을 불러 만나 보았는데 그 사람이 그제서야 이종성 대감인 줄 알고 부복하며 황공하게 여겼다. 이종성이 좋은 말로 타이르고 수일동안 유숙시킨 뒤에 통화문의 수문장을 시켰다. 하루는 이종성이 무장을 불러 신신 당부하였다. 오늘 밤 누(漏)가 파하고 궁문을 열 적에 반드시 궁비(宮婢-궁중의 여종)가 붉은 포대기로 함지를 싸서 음식물처럼 이고 들어올 것이다. 네가 곡직(曲直)을 묻지 말고 수색해 보면 반드시 어린아이가 있을 터이니 모진 마음 먹고 손을 대어 한 칼에 두 동강이를 내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죽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 무장이 그 날 밤에 명심하고 기다리고 있었더니 과연 이종성의 말대로 한 궁비가 함지를 이고 들어오므로 불문곡직하고 칼을 휘둘러 죽이니 온 궁중이 놀라 동요하였다.
이튿날 아침 전정(殿庭)국문에서 드디어 후궁 문씨의 간악한 계책이 발각되어 같이 모의한 문씨 집안의 족속들을 모두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세손(世孫-정조)의 자리를 보존하게 되었다.
오천대신 이종성의 기지가 아니었으면 궁중에 큰 난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종성이 죽은뒤 정조(正祖)가 지어 내려 보낸 제문(祭文)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용산강가에 낚시 드리울 때 기다린 사람 누구였더뇨 垂釣江上 所須河人 (소주강상 소수하인) 또 이러한 구절이 있다. 오월강가에 누구를 위하여 지루하게 기다렸던가 五月江上 爲誰遲遲 (오월강상 위수지지)
우리 옛 선비들의 발자취는 이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