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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획] 우리고을 포천의 문화유적 ⑤ - 용연서원(龍淵書院) 下

조경, 장릉의 지석문 지어 정헌대부에 올라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5년 07월 12일


최 종 규
포천명유회 회장



▲ 조경(趙絅) 1586(선조 19)~ 1669(현종 10)

선생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신북면 가채리에서 살았으며 신북면 한반위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자는 일장 호는 용주·주봉·간옹이며 본관은 한양이다. 절충장군 수곤의 증손, 공조좌랑 현(玹)의 손, 봉사 익남의 자이고 유개의 외손이며, 이조판서 김찬의 사위이고, 윤근수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출해 주위 사람들이 기재라고 칭찬했다. 1612년(광해군 4)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이이첨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정사를 그르치는 일이 많으므로 거창으로 돌아가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세상을 피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후 재학사들을 불러 모을 때 유일로 고창현감과 경상도사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형조좌랑에서 목천현감으로 전직되어 백성들의 고통을 묻고 학교를 정비하니 고을 사람들의 칭송을 많이 받았다. 1626년(인조 4)에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연이어 사헌부, 사간원에 있게 되었다.

1627년(인조 5)에 후금이 침입하여 안주와 평양을 이르러 백성들의 호패를 풀어 성가에 걸어 놓고 도망갔다. 이때 그는 사서로서 문학으로 있는 김육과 함께 상소하여 호패법을 혁파하여 인심을 수습하게 되었다. 인조가 강도로 출행하면서 세자를 시켜 전주로 내려가 군대를 위무하게 하니 수행하였다. 적이 얼마 후에 강화조약을 맺고 돌아갔다. 이때 지평으로 있으면서 호서절도사 유림이 능침을 벌거숭이로 만든 사람을 뇌물로 받고 용서해준 것과, 간관 윤황의 잘못을 지적하고, 강홍립의 죄상을 논하는 상소를 했다가 물러났다. 다음해에 교리가 되고 또 지평이 되었다. 1631년(인조 9)에 사간원헌납으로 있다가 정랑이 되었으며, 상소사건으로 말미암아 부교리가 되고, 외직으로 지례현감으로 나아갔다.

1633년(인조11)에 다시 이조정랑이 되었다가 1635년(인조13)에 집의가 되었고, 잘못을 지적한 상소 때문에 체직되었다. 다시 문천군수로 나갔다가 내직으로 돌아와 군기시정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 14) 사간으로 응지하여 봉사를 올렸는데 ‘왕자의 전택이 제도를 벗어난 것과 장릉의 빈전 역사에 대한 상격이 법도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좌의정 홍서봉 부자의 탐학을 고하였다. 이 때문에 두 번째로 하옥되었다. 이때 동지의금부사 민형남과 경연관 유백회가 간관을 가두는 일은 2백년 내에 없는 일이라고 간하였으나 두 사람을 체직하고 말았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끝나고 묘당에서 척화자 10인을 논죄할 때 다시 대상이 되었으나 도승지 이경석이 계로써 만류하고 임금의 명으로 논죄를 파하였다. 1639년(인조 17)에 사직하고 고향인 거창으로 돌아가 있다가 1640년(인조 18)에 사간으로 다시 임명되어 시무책을 상소했다.

1643년(인조21)에 일본에 통신부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복명하니 그 논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통정대부로 승진하고 형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얼마 후 김제군수로 임명했는데 대신들이 왕에게 품하여 전주부윤으로 전직하였다. 1645년(인조23)에 다시 사간이 되었다가 상소가 화근이 되어 체직되었다. 그후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는데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했다.

1646년(인조 25) 도승지에서 대사간으로 전직되어 미처 사은하기도 전에 특별히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로 곧 사퇴했다. 얼마 후 예조판서가 되어 재성의 일을 겸임하게 되었다. 다시 이조판서에 전직되어 사퇴하고자 했으나 허락하지 않아서 그대로 종사하였다. 다음해에 대사헌으로 전직되었다. 1649년(인조 27)에는 내의원의 일을 보고 있었는데, 왕이 위독하자 입시한 바, 이때 인조가 훙하였다. 이 죄로 인하여 정승에서 물러나 한때 복상되었다가 이조판서가 되고, 다시 예조판서로 옮기었다. 그해 9월에 장례에 참석하고 졸곡에 참례한 다음 사직하니 대제학을 체직하고 좌참찬을 삼았다. 장릉의 지석문을 지은 공으로 정헌대부에 올랐다.

1650년(효종1) 청나라의 사문사가 인조가 죽었을 때 사표에 황부왕의 조문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을 죄삼아 이경석과 함께 의주의 백마성에 안치토록 하여 이듬해 풀려 나왔다.

1653년(효종 4) 부모 공양을 위하여 회양부사로 나아갔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돌아왔다.

1655년(효종6) 이미 나이 70을 넘으니 기로라 하여 왕은 본도에 명하여 쌀과 고기를 하사하고, 그 다음 해에도 또 다시 이를 하사했다.

1661년(현종2)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어 사퇴하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669년(현종10) 죽으니 나이는 84세였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문간이다. 포천의 용연서원 춘천의 문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주집』, 『동사록』이 있다. 그는 나라를 위해 많은 업적을 쌓았을 뿐 아니라 포천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포천의 명소를 비롯하여 풍습과 포천인의 빛나는 발자취를 글로 적어 오늘에 전한 보람으로 후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견성지』를 제일 먼저 착수하였다.

신도비명은 미수 허목이 찬했다.

▲용연서원의 구성과 배치

용연서원은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쪽으로는 시야가 트이면서 들이 펼쳐져 있다. 최근에는 주택이 삥둘러 있지만, 아직도 서원의 위치에서 배산임수를 중히 여긴 풍수사상에 영향을 살필 수 있다.

서원을 구성하고 있는 건축물은 이덕형 선생과 조경 선생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과 강당 뿐이다. 거의 모든 서원에서 일반적으로 갖추고 있는 재실이 아직 복원되지 않았다. 장판교, 서고, 제기고, 고사 등도 갖추지 못하였다. 강당 건물이 향사를 대비해서 쓰이는 유일한 건물이다. 고사 대신 약간 떨어진 곳에 용연서원 재실이 있어 서원의 관리를 맡고 있다.

용연서원의 건축양식은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소박하여, 건물의 규모도 크지 않다. 대체로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된 19섹디 서원의 단순한 형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① 강당
강당은 유생들이 경학을 공부하던 서원 건물의 하나이다. 강당의 일반적인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다. 서원 경내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넓은 대청마루와 온돌방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건물 중앙의 처마 밑에 서원 명칭의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서원은 건물 내벽에 액자로 꾸며진 서원의 상량문이 걸려 있다.

강당에는 대청마루로 오르는 동서의 양 계단이 있으며, 온돌방 앞에 별도의 계단이 있다. 이 강당 건물도 근래에는 학문 연마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기 보다는 주로 향사를 준비하거나 서원 관련 임원들의 회합 장소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② 사당
용연서원의 사당, 사우 역시 이 서원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제향 시설물이다. 이덕형, 조경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사당의 위치는 정침 동쪽으로 하고, 규모는 1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겹처마 맞배지붕 이익공에 방풍판을 단 목조기와로 축조되었다. 안에는 마루를 깔고, 그 위에 자리를 펴 두었다. 그리고 중간 도리 밑에 중문을 만들고, 칸마다 4짝의 복합문을 달았다. 복합문 밖에 3급인 두 섬돌을 놓았는데, 동쪽을 동계라 하고, 서쪽을 서계라 부른다. 사당 안 동쪽과 서쪽의 벽에는 큰 궤를 하나씩 만들어 놓고, 서쪽 궤에는 유서와 의물을, 동쪽궤에는 제기를 각각 보관한다. 안 쪽 중앙 좌우 측에는 조경과 이덕형의 신위와 영정을, 북단에 남향하여 모시었다. 사당 주변에는 네모난 담을 쌓고 앞 쪽에 외문을 낸다. 외문은 사당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사당의 중문과 마주보게 된다. 이밖에 용연서원에는 외삼문, 내삼문, 홍살문 등의 시설물이 있다. 홍살문은 최근에 재건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서원 고유의 홍살문 양식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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