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 종 규 포천명유회 회장
▲ 서원의 연혁
용연서원은 지난 1976년8월27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용연서원 1691년(숙종 17)에 이사상(李師相) 등의 남인계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이덕형(李德馨)과 조경(趙絅)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와 영정을 모셨다. 남인 집권기인 1692년(숙종 18)에 ‘용연(龍淵)’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용연’이라는 사액은 지금의 서원터 부근에 있었던 연못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서원 이름은 ‘용연’이라 한 것은 용주(龍洲) 조경선생의 호를 따서 명명한 것 일 수도 있으나, 이곳의 지명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포천군 읍지인 『견성지(堅城誌)』「명승」조에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용연서원은 특히 경기도내 남인세력의 유력한 근거지로서 선현배향과 향촌교화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임진왜란 당시 이덕형이 세운 공로가 인정되어,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되었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사우, 강당, 동재, 서재 등이 있었으나 6·25 등으로 소실되어 사우만 남았었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목조기와로서 1972년에 보수하였다. 사우 안에는 이덕형, 조경의 영정과 위패가 각각 중앙 좌우에 봉안되었다.
이후 지속적인 복원사업으로 강당, 담장, 외삼문, 홍살문 등을 복원하여 창건 당시의 모습을 거의 회복하였으나, 동재와 서재는 아직도 복원도지 못하였다. 매년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포천유림의 주관의 음 2·8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 배향인물
용연서원에 배향된 이덕형(1561~1613)과 조경(1586~1669)은 모두 이곳에서 은거하면서 만년을 보낸 인물이다. 남인계 학자라는 점에서 상통한다. 조경은 이곳의 지명을 따서 자신의 호를 ‘용주(龍州)’라고 하였다.
이덕형이 이곳에 은퇴한 이유는 바로 공이 어렸을 때 성장하였던 외숙 유전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덕형은 남인출신으로 영의정이자 북인의 영수였던 이산해(李山海)의 사위가 되어 한때 남인과 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켰으나 뒤에는 남인에 가담하였다.
-이덕형(李德馨) 1561(명종 16)~1613(광해군 5)
선생은 조선시대 문신이며 학자로 포천읍 자작리에서 출생·성장하였다. 자는 명보(明甫), 호는 포옹산인(抱擁散人)·쌍송(雙松)·한음(漢陰)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좌의정 극균(克均)의 5대손이며, 지중추부사 민성(敏聖)의 자이다.
백사 이항복,봉래 양사언과 절친하였으며 용연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학문에 정진하여 1580년(선조 13) 20세의 나이로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 승문원에 재직하면서 선조의 눈에 들어 서적을 하사받는 특전을 누렸으나 장인 이산해가 도승지로 재임하고 있을 때라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 곧 사양하였따.
이어 홍문관정자를 배수받았고 1582년(선조 15)에는 조사(詔使)로 온 명나라 사신 왕경민이 그의 소문을 듣고 만나려 하였으나 사신을 사사로이 만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자 왕경민은 그의 인격이 출중함과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담은 글귀를 지어 전하기도 했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1584년(선조 17) 서총대(瑞 臺)에서 배풀어진 응제(應製)에 장원하였으며 이후 부수찬, 평안도암행어사, 정언, 부교리, 이조좌랑, 성균관직을 역임하였다.
1588면(선조21) 이조정랑으로 일본의 사신 겐소(玄蘇) 등을 접대하였으며 1590년(선조23)동부승지, 우부승지,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예조참판으로 대사성을 겸하고 다시 겐소, 야나가와 등과 용인에서 화전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진을 점령한 후 북상하던 왜장 고니시가 충주에서 그를 만날 것을 요청해오자 이를 수용하여 혼자 적진을 향해 들어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선조가 신의주로 피난하던 중 평양에 이르자 왜군은 이미 평양에 도착하여 화의를 요청함에 단독으로 겐소와 대담하여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하였다.
이후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고 명나라에 청원사로 파견되어 명의 원조를 구하였으며 돌아와서는 대사헌을 지낸 후 한성판윤으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접반관이 되어 전쟁이 끝날때까지 그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이듬해 병조판서를 지낸 후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였고 1595년(선조28) 경기도를 비롯하여 황해·평안·함경 4도의 체찰부사를 역임하였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이 일어나서는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명의 어사 양호를 설득하여 뜻을 이루었으며 명군과 함께 울진까지 동행하여 그들을 위로하였다. 또 이순신, 명의 제독 유정과 함께 순천에서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하기도 했다. 1598년(선조31)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으로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하였고 이듬해 홍여순이 유정과의 관계를 모함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10여 회에 걸쳐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1601년(선조34) 행판중추부사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의 체찰사를 겸하여 민심의 수습과 군비정비에 경주하는 한편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주창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02년(선조35) 40세에 영의정에 올랐으며 1604년(선조37) 양란때의 공을 들어 이항복이 호성공신에 녹훈할 것을 주청했으나 시기하는 무리들의 반대와 본인이 고사로 책록되지 못했다. 1606년(선조39) 영중추부사로 옮겼다가 1608년(선조 41)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재차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이때 임해군의 고변이 있어 삼사와 모든 대신들이 법대로 처리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항복과 함께 의로써 처단하는 것보다는 은(恩)으로써 감싸줄 것을 주청하였다. 1613년(광해군5) 이이첨의 사주로 삼사에서 영차대군을 극형에 처할 것과 폐모론을 일으키자 이항복과 함께 극력 반대하였으나 모함을 받아 삭탈관직 당하여 양평에서 은둔중 병사(病死)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남인출신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중도론을 견지하다가 후에 남인계열에 가담하였다. 인조 즉위 초에 아들 여규의 주청에 의해 복관되었으며 포천의 용연서원과 함께 상주의 근암서원에 제향되고 있는데 1829년(순조 29)과 1831년(순조 31) 근암서원과 안동의 소수서원에 영정을 봉안하였다. 이석창은 그를 오리 이원익, 필운 이항복과 함께 혼조삼이(昏朝三李)라고 평하였는데 이는 3인이 광해군때 진충을 하고도 참소를 입었기 때문이다. 글씨에 뛰어나 근묵에 유필이 남아있으며 저서로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전한다. 묘는 양평 양서면 목왕리에 있는데 1985년 경기도 기념물 89호로 지정되었으며 신도비문은 용주 조경이 지었고 묘지명은 이항복이 지었다.
 용연서원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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