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면 우금리 산 89-1 번지에 가면 1979년 12월 1일 건립한 육군사관학교 생도 6·25 참전기념비가 있다.
‘1950년 6월 25일 미명 북괴공산군이 불법남침하자 수학 중이던 육사생도 1기(현 10기) 312명과 생도 2기 330명은 육사 기간 장교 및 교관들과 함께 사관생도로서 용약 출전하여 초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를 기리기 위해 최초의 격전지인 이 자리에 기념비를 세운다’(기념비문 전문 : 한자는 한글로 썼음) 비의 규모는 기단 높이 1.2m, 비신 5m로 세워졌다.
1950년 6월 25일 육군의 간성으로 임관을 2주일 앞둔 1기생과 입교 25일된 2기생 도합 597명의 생도가 육사의 학생이었는데 1기생의 2/3 정도는 외출 중이었고, 2기생은 자격사격(육해공군 모두 년1회 실시)을 위해 영내 대기 중 참모총장의 명령을 받은 ‘교무처장 조암’중령을 대대장으로 부대대장 소령 손관도 외 대위 최재영(S-1), 대위 이승우(S-3), 소령 최영규(S-4), 제1중대장 대위 송인률, 2중대장 소령 박응규, 3중대장 대위 이원엽, 중화기중대장 대위 박정서로 지휘부를 구성, 1기생이 소·분대장 및 사수가 되고 2기생이 소총수, 분대원, 탄약수가 되어 25일 16시 기산리 쪽으로 출동하였다.
지도 한 장도 없는 위급상황에 긴급대치하는 작전은 무모한 듯 보였으나, 포천전투의 위급성과 수도 서울 사수 결의에 찬 생도들은 경찰과 합동작전을 전개 적군 제3사단 9연대(연대장 김만익)와 맞서 용감히 싸웠다.(200명의 적 사살)
김영신 생도의 증언이 이를 입증하였다. 끝내는 적과 백병전으로 맞서 싸웠다. 1:3의 감투정신으로 싸웠다.
19시까지 철수명령이 하달될 때까지 적에게 준 손실은 막대하였다. 아군은 생도 27명만이 전사하였다.
육군사관학교의 ‘지(知)·인(仁)·용(勇)’ 정신을 실천한 첫 전투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특별히 잊지 못할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포천군 포천읍 신읍리 김동진 이장님의 아들 김문한 생도 1기생이 참전하였다는 점이다. 김문한 생도는 그 후, 소위로 임관 각종 전투에 참가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모범고급 장교로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 대한 맹인복지회에서 봉사하시기도 한 김문한 대령은 매우 늠늠한 기상에다 정규 육사생도 출신 장교답게 그 모습이 군인정신의 표상이었다. 김문한 대령은 박정희 독재 정권의 혁명의 부당성과 혁명 공약의 마지막 공약사항인 민간정부로의 정권이양을 주장하는 군 관계자들과 정의로운 모임을 가졌었다는 사실도 아는 포천인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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