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6.25전쟁에 피란을 갔다 와 보니 마을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집터에는 군부대가 주둔해 있었답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말 그대로 피난민 소굴이었지 뭐에요.
군인들은 피난에서 돌아온 마을 주민들을 위하여 짚이나 풀을 섞어 흙벽돌을 찍어 벽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나무라고는 몇 개 남지 않은 국망봉 줄기 큰산에서 삐뚤어진 참나무며 소나무 몇 개씩을 베어다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못이 없으니 대검으로 철조망을 잘라 못 대신 박고 철사로 동여매어 집을 지었습니다. 마치 원고지 여섯 칸 같은 모양으로 방 하나 부엌 하나, 방 하나 부엌하나 식의 한일자 구조로 된 집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군인가족이 세 들어 살던 빈방에 고물을 캐러 다니던 사람들이 묵었습니다.
웬만한 집이면 다 있는 고물 탐지기가 우리 집에는 없습니다. 탐지기를 사려면 쌀 몇 말 값은 실히 주어야 하는데 그만한 돈을 구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 탐지기를 대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왱우왱 왱왱왱….
고물을 캐는 아저씨들은 탐지기 소리가 나던 곳에 곡괭이질을 시작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하지감자를 둔 보리밥을 지어 새참으로 대접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땅이 파헤쳐지자 땅 속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탄약과 박격포 탄이 묻혀 있었습니다.
“아이구 저거 봐라! 순 탄약이네. 여기가 탄약고였었나 봐!”
“조심해야 해. 하나만 터지면 다 죽는 거야”
워낙에 배를 곯던 사람들이라 죽는 것도 무섭지 않나 봅니다.
원래 아군의 탄약고 자리였는데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미쳐 모두 가지고 이동할 수 없어 땅을 파묻고 후퇴한 것이라 어른들은 말합니다.
가끔 이웃동네서 포탄을 분해하다 터져서 여럿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그렇지만 우리 식구는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가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었기 때문에 횡재를 한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탄약만 열 가마니가 넘었고 대포도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고물 캐는 사람들과 출토된 많은 양의 탄약을 똑같이 나누었습니다.
엄마는 그 어려운 중에도 남에게 선행을 베풀다가 뜻밖의 횡재를 한 셈입니다.
탄약을 팔아 아무리 잘 닦아도 금방 시퍼렇게 녹이 나던 놋그릇과 잘 깨지던 사기그릇을 사과궤짝으로 만든 찬장 구석에 박아두고 그렇게도 깨끗한 양은그릇 몇 벌과 양은솥, 그리고 쌀 한 가마니와 보리 두어 가마니를 방의 윗목에 들여놓으셨습니다.
그 해 여름은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 보릿고개에 쌀밥을 먹어보다니….”
우리들은 유월의 보릿고개에 십만 단어 국어사전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기쁘고도 벅찬 어머니의 기도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천지신명이시여! 우리들을 굽어 살피소사 크신 은혜에 감사 드리옵나이다.”
어머니는 시루떡을 하여 고사를 지내시고 장독대며 뒤뜰과 광, 그리고 시렁 위에 올려놓으셨고 나머지는 이웃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 때 그 시루떡 맛이란 정말 잊을 수가 없네요.
(계속)
김 순 진 시인, 소설가, 수필가 http://cafe.naver.com/yob51 011-9123-4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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