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창 종 수필가
조영원 선생은 창수면 추동리에서 출생하셨으며(1882년 5월 11일∼1974년 4월 22일) 1907년 3월 유신학교(維新學校)를 졸업하셨고 1910년 조선이 왜놈들에게 강제 합방되자 당시 서간도에 망명중인 이동령, 이시영(독립후 부통령)님들과 연락 국내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1920년 상해로 망명 동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지금의 국회와 같음)의원으로 뽑히셨으며 1921년 3월 의정원 비서장(지금의 국회사무총장)을 겸임하셨다. 동년 5월 의열단 중앙집행위원이 되셨으며, 1924년 5월 15일에는 임정 국무원 사무국 참사에 임명되셨으며, 동년 한국유일당(동년 6월) 촉성회 중앙 집행위원이 되시고 1926년 8월 촉성회 대표로 만주에 파견 12월 김좌진 장군의 추천으로 신민부(新民府) 고문이 되셨다. 1927년 3월 해림신창학교를 창설 교장이 되시었다. 또 신한농민당 조직부장을 역임하셨다.
1931년 11월 이청천(李靑天) 총사령과 휘하 한국독립군 총사령부를 이종주, 홍진 등과 함께 조직 총참모장이 되시어 남만주에 흩어진 독립군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고 중국 항일구국군과 연합장전(사령과 李杜)을 수행 큰 전과를 올렸다.
왜놈들에게 잡혀 (1933년 9월 안종명과 함께) 3개월의 옥고를 치르셨으며 해방 후, 한독당(당주:김구) 상임임위원을 역임하시었다. 이규채(李圭彩)님 (1888년 6월 6일∼1948년 2월)은 가산면 방축리 군자정에서 출생하셨으며 호는 자정(字精)이시다. 3·1독립운동 후 학생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상해로 망명, 1924년 12월 임시정부의 정원 의원이 되셨다. 1930년에는 한국 독립당 정치부 위원 겸 군사부 참모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셨다. 1930년 7월 26일 한족자치연학회를 모체로 만주에서 한국독립당을 창설(홍진, 신축, 남대관, 이청천, 이종선, 황학수, 이장녕, 홍심련 님 등) 독립군 정예부대인 한국 독립군을 편성하고 활약하였다. 총무위원장이 도시어 중국군과의 공동 항일전을 교섭하기도 하셨다. 이후, 중국 길림 육군 제3군 상교참모(上校參謨)로 활동하기도 하셨으며 신한독립당 감찰위원장으로 활동하시기도 하였다. 1935년 상해에서 왜놈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에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다. 해방 후 일시 종교·언론계에도 머무르셨으나 정계에 투신 미·소 공동회의 대책 국민연맹 대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등을 역임하셨다. 1963년 늦게나마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셨다. 이토록 두분의 임시정부 요인이자 독립군 고급장교 참모로 직접적인 독립투쟁을 하신 분이 내 고향 포천에 계시다는 점을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요즈음 권력에 아부하고 처세에 능한 사람들이 자신의 부귀와 영달만을 누리고 살고 있다.
그러나 내 고향 포천에는 그런 파렴치한이나 매국노보다도 애국 애족의 일생을 보낸 분이 많이 있어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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