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면 쉬면서 찹쌀떡을 꺼내 나누어 먹으면서 옛날이야기하면서 처는 1개를 먹고 저에게는 4개를 먹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저를 위하여 아낌없는 마음 주고 정을 준 아내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앞을 가로막아 글을 쓸 수가 없다.
저의 처가 하늘나라로 떠난지 4개월 하고도 3일 되는 날. 1993년 12월 5일 남가좌동 형님이 김 권사를 모셔 왔습니다. 제가 병나기 전 빌려준 돈을 안 갚으면 고소 한다고 하니 온 것입니다. 달재 아우가 병원에서 퇴원하여 집으로 오는 차안에서 형 이젠 형제들한테 의지할 생각 하지 말라고 한 말을 하였더니 형님은 큰소리 고함을 지르면서 형제간에 큰 싸움만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나는 혈압이 상승하여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
병들어 장애가 생긴 아우를 두고 그렇게 싸움만 하니 이 심정을 어찌 글로 표현 할 길 없다. 주여. 주여. 차라리 하루 빨리 저의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하면서 눈물로 기도를 돌려도 소용없고 지루한 투병생활은 계속됐다.
투병생활에 피 눈물나는 고생은 계속되었지만 누구 한 사람 찾아와서 위로하는 사람이 없고 오직 우리 주님만 저를 보호하시고 인도했다. 오직 우리 주님만 의지하고 투병 생활하는 것을 이 글로 다 옮길 수가 없다. 차라리 하루속히 하늘나라로 가고픈 심정을 어찌 표현할 길이 있을까? 1994년 1월 1일 새해아침 저의 형제들은 저의 집에 모여서 신년새해예배를 올렸다.
어찌하여 이 몹쓸 병에 걸려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가 너무 원망스러워 눈물만 흘렸다. 명절날 형과 아우가 위로금을 주고 갔다. 없는 살림에 치료비로 사용할 수 있어 너무 고마웠다. 그런대로 명절을 보내고 추운 엄동설한에 경복중학교 운동장에서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밤마다 열 바퀴 이상을 돌았지만 회복은 되지 않았다.
아들 정호는 밤마다 내 몸을 주무르고 처는 대소변을 받아주면서 고생만 했다. 또한 치료비를 보태겠다고 가산면 방축리 신발공장에 취업을 해 출근했다.
처가 너무 고생을 하여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처가 안쓰러워서 퇴근 할 때 쯤 1.5km 떨어진 곳까지 마비된 다리를 질질 끌면서 마중을 나가면 처는 왜 나왔느냐고 야단을 치지만 함께 걸어오는 그 길이 너무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