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망울을 터트릴 이 무렵이면 나는 해마다 춘심을 공유할 수 있는 지인 몇 분과 모처에서 봄꽃맞이 저녁모임을 한다. 반찬도 신선하고 국물도 시원 깔끔해 입맛과 술맛을 돋우는 집이다.
“딱 한잔씩만”이라는 약속 하에 한잔 씩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데 앞자리에 다섯 분이 와서 남자 여자 앉고 맞은편으로 남자 남자가 앉았다. 그중 젊은 여자가 차림상 한 켠으로 조신하게 앉는다. 물수건을 펴고 “이집 괜찮은데” 하며 두리번거리더니 남자둘이 앉았던 자리에서 한 남자가 뒤로 물러나며 옆에 앉은 남자를 그 자리로 끌어 붙인다.
“이리 앉으라우 그래야 목소리도 들어보고 얼굴도 잘 볼 수 있지 않지 않겠수?” “아니 괜찮아요.” “아 그러지 말고 여기 S여사 옆으로 와요. 아 나이가 어려 부끄러워하나 원” 막무가내다. 그러자 S여사라는 분 얼굴이 발그레 해진다.
아하! 분위기 파악 된다. 히히히 재미있고 흥미로워 그네들을 살펴보니 그들은 완전 은발에 칠십오세 정도는 됨직하다. 모두 귀티가 나고 곱게 물든 단풍처럼 아름다운 노년들이다. “자, 자 음식 끝에 정 나고 한잔 술에 눈물 난다는데 맛난 음식에 딱 한잔씩만 합시다. 자 여사님 여사님을 위하여!!!” “위하여”
낮은 목소리로 하는데도 목소리에 바리톤의 윤기가 흐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그들은 삶이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잘 알며 너무도 소중하게 자신의 순간을 사랑하는 듯 했다. “박형 우리 옛날 학창시절에 이런 글귀가 있었지? 들어보게. 생각 끝엔 졸음이 오고 그리움 끝엔 만남이 있나니 그대여 부어라 나는 마시리.”
“에이 아니여, 그리움 끝엔 잊음이 있나니여.”, “호호호 모두 춘심에 젖으셨나 봐요. 저는 김소월님의 ‘초혼’과 김영랑 님의 ‘모란이피기까지는’을 매일 외우고 다녔어요.”, “허허허 그려 봉 여사 문학 소녀였구먼. 자 그럼 그 옛날의 문학소녀를 위하여 딱 한잔만 더, 위하여!”
그 팀이나 우리 팀이나 딱 한잔이 거의 각 일병이 되는 듯하다.
“2차는 물론 3차, 4차 내가 오늘은 완전 쏘리다.” “아 그러면 안되지. 우리도 쏠 기회를 주라고.” “여보게 친구, 자네 내 말 한번 음미 해 해보게나. 자식은 품안에 자식이요. 내외도 이부자리 안에 내외라. 야무지게 산들 뾰족할 것 없고 덤덤하게 살아도 밑질 것 없다네. 속을 줄도 알고 속아 줄지도 알아야 한다네. 니 주머니 든든하면 날 술 한잔 받아 주고 내 돈 있으면 니 술 한잔 또 사주고 니요 내요 그렇게 사는 게 생이지 거물거물 서산에 해지면 자넨들 지고 갈까? 안고 갈까?”
“우리 술 한 잔 더 하게나”, “와, 멋진 말씀이다.” 좌중의 박수 소리가 뻐근하다. 앞좌석도 술이 오른 듯 한데 로멘스 그레이처럼 온화함과 지성이 겸비된 순수함이 묻어나는 듯 한 것이 삼국지에 나오는 무릉도원에서 매화 꽃잎 술잔에 띄워 세월을 벗하는 도도한 선인들 같았다.
“자 우리 그만 일어나십시다. 아! 김 여사님은 저쪽 팀과 딱 한잔 더 하셔도 용서가 되겠습니다. 하하하하” “아이 그 무슨 복 받으실 말씀을... 감사합니다. 오늘 기분 완전 짱입니다. 후후후.” 그분들께 신선주 한 병 드릴 것을 계산하고 나서니 조금은 늦은 밤이건만 공기가 싱그럽고 가슴이 훈훈한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