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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기고=김남영] 세상사는 이야기-95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4년 05월 13일
 
김남영/ 포천신문 운영위원장  
5월11일은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일 입니다. 저의 고향은 입암산과 방장산을 사이에 두고 전라남도 장성군과 전라북도 정읍시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입니다. 

입암산성은 고려 시대 이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축조 시기를 알 수 없으나 몽골의 고려 침략과 임진왜란 때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북 정읍시에서 전남 장성군으로 넘어가는 장성 갈재의 입암면 군령마을은 조선시대 군대가 주둔했기에 군령마을로 불렸습니다.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병참기지가 있던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일본군 병참기지가 있던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 마을 인근에는 증산도 종교의 발상지 대흥리라는 마을도 있습니다. 고향 장성에 다녀오는 길에 이웃동내 정읍시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일부러 들른 이유는 동학농민혁명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입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은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반외세 운동으로,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에 항거하였다 해서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긴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갑오개혁,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860년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창시되었는데, 동학은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봉건사회를 반대하고 서학과 왜를 배척하는 반외세사상을 주장하면서 점차 그 교세가 확산되었습니다. 이에 조선의 조정은 동학을 사교로 금지하고 1864년에는 교조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하는 등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동학은 농민들을 중심으로 더욱 확산·조직화됐고, 이후 동학의 창시자였던 최제우의 억울함을 해소하고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 이 전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조신원운동 이후에도 정부의 묵살은 계속됐고 여기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불법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동학교도들은 1894년 1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전라도 충청도 일대 농민들을 모아 고부 관아를 습격해 고부민란(古阜民亂)을 일으켰습니다. 관아를 점령한 전봉준은 조정에 조병갑의 횡포를 시정할 것과 외국 상인의 침투를 금지하라는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했으며, 조정으로부터 폐정을 시정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부민란을 조사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는 오히려 민란 관련자들을 역적죄로 몰아 혹독하게 탄압하였습니다. 이에 전봉준과 그를 따른 동학교도들은 고부 인근인 고창군 무장현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용태의 횡포가 심해지자 전봉준은 무장 지역의 손화중과 합심해 다시 수천 명의 농민들을 모았고, 1894년 3월 21일 최시형의 탄생일을 기해 궐기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태를 접한 정부는 장위영 등의 군대를 파견하였고 농민군은 황토재 승리에 이어 정읍, 흥덕, 고창, 영광, 함평, 장성, 나주, 태인, 부안 등에서 관군을 무찌른 것은 물론 삼남지방을 휩쓸면서 전주성을 점령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주성 점령 이후 관군과 농민군의 접전으로 양측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청에게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에 그해 5월 5일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하였습니다. 이에 나라 안팎의 위급상황을 인지한 전봉준은 5월 8일 관군과 폐정개혁을 실시한다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톈진조약(조선에 대한 청과 일본의 동등 파병권)에 따른 청나라군의 개입을 빌미로 5월 6일 조선에 군대를 파견, 인천에 상륙하였습니다. 화약을 맺은 관군은 몇몇 부대를 전주에 남기고 철군하였고, 동학농민군도 철군 및 해산했습니다. 그러나 군현의 행정이 혼란과 마비상태에 이르자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은 상의 끝에 호남지방의 각 군현에 농민자치 기구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이때 12개 폐정개혁안을 내걸고 민정(民政)을 실시하였는데, 그 12개 항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동학교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일소하고 서정에 협력
② 탐관오리 엄벌
③ 횡포한 부호를 엄징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
⑤ 노비문서 소각
⑥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⑦ 청상과부의 개가 허용
⑧ 무명잡세 일체 폐지
⑨ 관리채용 시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등용
⑩ 왜와 통한 자는 엄징
⑪ 기왕의 공사채를 무효로 할 것
⑫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

이러한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1차 봉기를 빌미로 조선에 입성한 일본군은 내정간섭을 강화한 데 이어 6월 2일 김홍집을 앞세운 친일내각을 설립하여 조선 정부에 내정개혁을 강요하였습니다. 이어 6월 21일에는 경복궁에 침입하여 고종을 감금하고, 6월 23일 청·일전쟁을 일으킨 후 25일에는 1차 갑오개혁을 강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행태를 전해들은 전봉준은 일본군 척결을 위해 김학진과 손을 잡고 제2차 기병을 준비, 9월 18일 삼례에서 집결(제2차 삼례봉기)하여 서울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반일감정이 쌓여 있던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등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민중봉기가 확산되자 조정은 군을 출병시키고 일본에 출병을 요청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습니다.

‘제폭구민(除暴救民)’ 포악한 정치와 포악한 지배층의 잘못을 없애고 그 위기로부터 백성들을 구해낸다는 것과‘보국안민(輔國安民)’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운명을 도와서 바로 세우고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한다는 기치로 출발한 순수한 농민전쟁은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나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의 개입으로 고전하게 되었고,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했습니다.

이후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김남영/ 포천신문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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