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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칼럼] 광해군 외교정책의 역사적 교훈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14년 10월 21일
↑↑ 박관우 역사작가, 칼럼니스트,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
ⓒ (주)포천신문사
필자가 최근에 임진왜란의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덧 4백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조선이 초토화가 되었으니 참으로 국가적인 재난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왕세자로 책봉된 인물이 있으니 본 칼럼에 소개하는 광해군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엄연히 국왕으로서 15년간 재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식 국왕의 호칭을 받지 못하고 군(君)으로 격하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광해군은 왜 그러한 대우를 받아야 하였던 것인지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광해군은 1575년(선조 8년) 조선왕조 14대 임금인 선조와 공빈김씨 사이에 2남중 차남으로 출생하며, 휘(諱)는 혼(琿)인데, 필자는 광해군의 휘(諱) 자체에서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1592년(선조 20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오르기 전인 4월 29일에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 임진왜란으로 악화된 민심을 수습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며, 왕세자로서 군사들을 총지휘하여 당당히 왜군에 대적하면서 장차 국왕으로서의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바로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시작된 왕실의 불행이었던 것이다.

원래 선조는 정통성 문제에 있어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은 바로 중종의 아들이었지만, 정비가 아닌 후궁창빈 안씨의 소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조는 자신의 아들 중에서 정비의 소생이 나오기를 바랐건만, 정작 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원자를 두지 못하고 1600년(선조 33년)에 승하한다.

생전에 광해군을 마치 자신의 친아들처럼 아꼈다고 하며, 그렇게 정숙하고 품위 있는 국모였다고 전하는데, 안타깝게도 원자를 두지 못한 채로 승하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의인왕후(懿仁王后)에 이어서 계비로 간택된 왕후가 바로 김제남의 딸인 인목왕후(仁穆王后)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선조가 승하하기 2년 전인 1606년(선조 39년) 원자를 소생하니 이가 바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인 것이다.

이러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탄생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선조를 비롯하여 소북파의 대신들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세자로 책봉하기 위한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뜻밖에도 1608년(선조 41년) 선조가 승하를 하면서 광해군이 33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이제 광해군이 즉위한 것을 계기로 임진왜란부터 자신을 지지하여 준 세력인 대북파의 강력한 후원을 받게 되면서 조정은 대북파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는 역모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광해군은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았지만 대북파의 강력한 주청으로 인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하게 되며 결국 영창대군(永昌大君)은 1614년(광해군 6년) 9세라는 어린 나이에 죽음을 당한다.

그런데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인목왕후(仁穆王后)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서궁으로 유폐되고, 친정 아버지인 김제남도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사건이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 하나의 명분을 제공하여 주었던 것이다.

광해군의 입장에서 볼 때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존재가 늘 부담스러웠다고는 하지만 당시 좀 더 포용력 있는 방법을 택하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윤리적인 문제 때문에 광해군이 재위기간 동안 펼친 여러가지 치적이 오늘날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비록 1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재위를 하였지만, 민생안정을 위하여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양전을 설치하는 한편, 임진왜란으로 질서가 무너진 한성부를 회복하고 창덕궁(昌德宮)의 중건을 비롯하여 경희궁(慶熙宮),인경궁(仁慶宮)을 준공하는 등 여러가지 치적을 남겼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으니, 그것은 광해군이 뛰어난 외교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후금(後金)을 치기 위해서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을 때 광해군이 비밀리에 강홍립 장군에게 밀지(密旨)를 내리어 명나라의 입장도 생각하면서 후금(後金)에게 투항(投降)하는 방법을 취한 것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한 결정이었다고 본다.

물론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의리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광해군이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에서 대단히 합리적인 외교력을 발휘하였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명분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실리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인데, 당시 친명정책을 대부분 지지하던 신하들로서는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죽음과 관련된 윤리적인 문제에다가 결국은 이러한 문제까지 빌미를 제공하여 여러 면에서 볼 때 개혁군주로서 결코 손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하여 왕위에서 폐위(廢位)되는 침담한 일을 겪게 되었다.

광해군은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폐주(廢主)가 되어 강화도와 제주도에서 한(恨)많은 18년의 세월을 보내고 결국 1641년 67세를 일기로 승하하게 된다.

비록 광해군이 윤리적인 문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백성들을 위하여 여러가지 정책을 실시하고, 특히 당시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효과적인 외교정책으로 후금(後金)의 침략을 막은 점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외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상황에서 귀감(龜鑑)이 될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박관우 / pgu77@naver.com
역사작가, 칼럼니스트,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14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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