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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칼럼] 의친왕의 파란만장한 생애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14년 10월 15일
↑↑ 역사작가, 칼럼니스트,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
ⓒ (주)포천신문사
오는 2015년이 연천 출신 의학자 박승석의 탄생 150주년이라는 뜻깊은 해가 된다는 것은 포천신문 2014년 10월 1일자 “비운의 의학자 연천 출신 박승석을 추모한다” 제하의 칼럼에서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2015년에 서거 60주년을 맞이하는 인물이 있으니 본 칼럼에 소개하는 비운의 황족 의친왕이다.

의친왕이 1877년(고종 14년)생이니 박승석보다 12년 연하라 할 수 있는데 참으로 흥미로운 점은 박승석과 의친왕은 띠동갑이라는 점이다. 의친왕이 1955년에 서거하였으니 한마디로 80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를 왜 비운의 황족으로 소개하였는지 그 생애를 뒤돌아보기로 하자.

의친왕은 1877년(고종 14년) 3월 30일 한양 북부 순화방 사재감 상패개 자하동에 위치하였던 철종의 후궁 범숙의(范淑儀) 처소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생모는 장귀인인데 명성황후에 의하여 궁궐에서 쫓겨나 의친왕은 생모와 함께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냈다. 여기서 의친왕의 외가는 덕수장씨 문중이며, 장귀인은 조선왕조 4대 문장가의 일원(一員)인 계곡 장유의 후손이었다.

1891년(고종 28년) 명성황후가 왕세자이었던 순종황제의 후사(後嗣)를 걱정하여 그를 다시 궁궐로 불러 들여서 의화군(義化君)으로 책봉(冊封)하였다. 1893년(고종 30년) 연안김씨 문중 김제남의 후손 김사준의 딸과 길례(吉禮)를 올렸다. 1894년(고종 31년)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특파대사 자격으로 유럽 5개국을 순방하였다. 1895년(고종 32년)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하여 시해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인하여 고종황제와 황태자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며, 조정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1896년(건양 1년) 엄황귀비의 계획에 의하여 고종황제와 황태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니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한편 1896년(건양 1년) 의친왕은 일본으로 가게 되며, 그 이듬해인 1897년(광무 1년) 1월에 미국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미국에 머물던 의친왕이 다시 귀국길에 올랐으며,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경운궁(慶運宮)으로 환궁(還宮)한 고종황제가 마침내 1897년(광무 1년)10월 12일 원구단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고 황제로 즉위하여 대한제국을 대내외적으로 반포하면서 이제 506년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고 마침내 대한제국의 서막(序幕)이 열렸다

이어서 1899년(광무 3년) 미국유학의 길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900년(광무 4년)에 의화군(義和君)에서 의친왕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의친왕의 유학시절과 관련하여 처음에는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시에 있는 웨슬레안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903년(광무 7년) 버지니아주 로아노크 대학으로 옮겼다.

이러한 유학생활을 마치고 일본 동경에서 8개월동안 체류한 이후 드디어 오매불망 그리워 하던 고국에 도착하니 때는 1906년(광무 10년) 4월이었다.

의친왕은 귀국한 이후 대한제국 육군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7월에는 대한적십자사 제4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경술국치 전해가 1909년(융희 3년),거창에서 전 승지(承旨) 정태균의 집에 1개월 머물면서 장차 의병투쟁을 벌이는 기지를 구입하려고 우국청년들과 거사를 모의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였다.

1911년 봄에 우이동의 계곡에서 의친왕과 의암 손병희가 밀담(密談)을 나눈 이후 몇 개월이 지나서 의암이 우이동 일대 3만평을 매입하였다. 1912년 그 일대에 봉황각(鳳凰閣)이라는 천도교 수련시설이 완공되었는데 이러한 봉황각(鳳凰閣)이야말로 3.1독립운동의 밑그림을 구상하였던 유서깊은 성지라고 할 수 있다.

1915년 신한혁명당에서 고종황제를 당수(黨首)로 추대하고 베이징(北京)으로 망명시키려는 거사를 추진하였는데 의친왕이 여기에 연루되었으며, 이 거사와 관련하여 의친왕의 장인이 되는 김사준이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제 의친왕의 대표적인 항일운동이라 할 수 있는 상해망명탈출사건을 소개한다. 이 사건은 대동단에서 의친왕을 총재로 추대한 이후 1919년 11월 상해로 망명시켜 임시정부의 구심점으로 삼아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추진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사 성공을 앞두고 단동역(丹東驛)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어 조선총독의 별장 녹천정(綠泉亭)에 40일동안 연금되었다가 다시 의친왕의 처소였던 사동궁(寺洞宮)에서 감시를 받았다.

이와 같이 철저한 항일의식(抗日意識)으로 무장하였던 의친왕이 1930년 6월 12일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은퇴당하고 작위를 박탈당하는 일을 겪게 되며, 결국 후실(後室)인 수인당(修仁堂)과 함께 일본 규슈(九州)에 머무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의친왕이 정확히 언제 귀국하였는지 모르겠으나 해방이후 6.25전쟁 당시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였으며, 마침내 1955년 8월 16일 안국동 별궁(別宮)에서 향년 79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치게 된다.

이상과 같이 비운의 황족 의친왕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뒤돌아보았는데 황족으로서 항일의식(抗日意識)이 투철하였던 그의 서거 6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숙연한 심정으로 추모하며, 그의 항일정신(抗日精神)이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기를 충심으로 염원한다.

박관우 / pgu77@naver.com
역사작가, 칼럼니스트,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14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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