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세밑에 30세의 청년 이승만은 선교사 몇 사람의 소개장을 들고 배로 태평양을 건너고 열차로 미 대륙을 가로질러 워싱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어진 임무는 미국 조야에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도를 설명하고 지원을 호소하고 얻어내는 것이었다. 민영환 등 대한제국 중신들이 이승만을 밀사로 고른 이유는 5년 반 동안 옥중에서 갈고닦은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많은 노력과 고생 끝에 이듬해 8월 시이도어 루즈벨트(1858~1919) 대통령을 만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이 약소국 청년의 하소연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승만을 만나기 5일 전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 - 테프트 밀약' 을 맺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국을 인정한 상태였다. 일본의 대미 외교는 주도면밀했다. 이승만 보다 먼저 워싱턴에 와있던 일본 특사 가네코 겐타로는 루즈벨트와 하버드대학 입학 동기로 크리스마스카드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었다.
루즈벨트는 가네코가 선물한 책 '무사도'의 영문판을 읽고 일본에 푹 빠졌고, 일본인 유도 고단자로 부터 매주 세 차례씩 유도를 배우고 있었다. 그 덕에 가네코는 문턱 높은 백악관을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다. 21세기에 각광받는 '소프트 파워' 외교를 일본은 이미 100여 년 전에 구사한 셈이다.
루즈벨트는 이승만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한국인을 위해 일본과 대결할 수는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위해 일본에 주먹 한 번도 휘둘러보지 못했다" 즉,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국민이 스스로 노력하고 희생하지 않는 나라를 위해 미국이 대신 희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이 말은 현재에도 유효하고 미국이 우리나라에 던지는 말일 수 있다. 루즈벨트의 중재로 1905년 8월 체결된 러·일 강화조약(포츠머스 조약) 1조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지도·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고 돼있다.
한반도에서 러시아를 몰아낸 일본은 석 달 뒤 한국의 외교권을 뺏는 을시늑약을 맺기에 이른다. 20세기 초 한국과 일본이 미국에서 펼친 외교전은 이처럼 시작 전부터 이미 승패가 정해져 있었다. 선교사가 써 준 소개장 몇 통에 의지한 미국 초행길의 청년 이승만은 가네코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몇 년 전 이었던가 미국 지명위원회(BGN)가 독도 영유권 표기를 '주권 미지정' 으로 바꿨다가 일주일 만에 철회했다. 그러자 우리 정부는 무슨 외교전에서 큰 승리라도 거둔 양 자화자찬 한 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원상회복일 뿐이다. 그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중립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공식 입장도 그대로다. 일본도 가만있지 않을 기세라 곧 2라운드 외교전이 치열하게 시작 될 것이다.
100년 전 가네코를 보냈던 일본외교의 치밀함은 지금도 대단하다. 지금이야 말로 일히일비 할 때가 아니라 한·미동맹과 방위조약을 굳건히 세울 때이다. 외교판은 점점 어려워지는데 우리나라의 외교 역량은 줄어들고 어려움은 늘어만 가고 있다. 우리 외교의 고질적 병패는 긴급한 현안이 발생하면 근거 없는 낙관론에 빠져 외교력을 발휘할 기회를 놓친다는데 있다.
이제라도 외교 안보팀은 전열을 가다듬고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트럼프 시대에 대응하는 전략을 짜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인데도 현 정부의 외교력은 답답하고 불안하다. 미·일은 우리를 의심하고 경계하는데 중국은 북한과 다시 손잡고 한국을 반격한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북한 핵 앞에서도 당리당략을 위한 싸움질로 지세우니 국민은 걱정이 태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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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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