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언어가 곧 국가의 정체성이자 국력인 시대에 살고 있다. 한 나라의 언어와 문자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를 넘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국민의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주권의 상징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대한민국 언어생활의 현실은 참담하다 못해 위태롭기까지 하다. 길거리의 간판부터 카페의 메뉴판, 주거 공간인 아파트 이름, 심지어 국민의 삶을 보살펴야 할 정부와 지자체의 공공 정책 용어에 이르기까지 무분별한 외래어와 외국어 오남용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최근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이러한 실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극명히 드러난다. 지자체 정책명 중 하나인 ‘스마트 pc 팜’, ‘놀 일터 메이커즈’, ‘리빙랩 네트워크’ 등은 그 설명을 따로 듣지 않고서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다. 중앙부처의 정책 역시 ‘로컬 크리에이터’, ‘메이커 스페이스’, ‘소프트웨어 융합 클러스터’ 등 온통 외국어 일색이다. 국립국어원 조사에 따르면, 공공기관이 사용하는 외국어 표현 중 일반 국민이 이해하는 단어는 전체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다. 알기 쉬운 우리말 정책 용어 대신 무분별한 외국어를 남용함으로써, 국민이 정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혜택에서 소외되고 허비되는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만 해마다 약 285억 원에 달한다.
문제는 공공 영역뿐만이 아니다. 일상생활로의 침투는 더욱 가혹하다. 대학가 간판의 절반 이상이 외국어로 도배되어 있고, 카페 메뉴판에는 한글 표기 하나 없이 영어로만 적혀 있거나 ‘미숫가루’를 ‘MSGR’로 표기하는 해괴한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매니지먼트 오피스’로 바뀌고, 아파트 이름은 외래어를 길게 조합하여 정작 살고 있는 어르신들조차 집을 찾기 어렵게 만든다.
특히 이러한 외래어 범람의 가장 큰 피해자는 60~70대 이상 어르신들과 정보 소외계층이다. 일상적인 차 한 잔, 음식 주문 하나조차 마음 편히 하지 못하고, 당연히 누려야 할 정부의 복지 혜택에서조차 소외당하는 현실은 단순한 언어 문제를 넘어선 ‘소통 절벽’이자 ‘사회적 위화감’의 창출이다. 외래어를 모르면 자기 나라 땅에서 소외당하고 삶에 지장을 받는 나라가 과연 정상적인 국가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세종대왕이 지금의 현실을 보신다면 통곡하며 기절하실 일이다.
물론 세계화 시대를 맞아 새로운 기술이나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외래어 사용이 일정 부분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화적 수용과 주체적인 언어 상실은 엄연히 다르다. 프랑스나 일본 등 세계 주요국들은 자국어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공공기관과 매체에서의 자국어 사용을 법으로 엄격히 규제하고 보호한다. 현행 『국어기본법』과 『옥외광고물법』에도 공공용어와 간판 등은 원칙적으로 한글로 표시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행정당국의 무관심 속에서 유령 법안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세계는 지금 K-팝, K-반도체, K-방산, K-푸드 등 대한민국 문화와 기술의 우수성에 열광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모든 K-컬처의 근간이자 한민족 최고의 창작물인 ‘한글’은 안방에서 홀대받고 짓밟히고 있다.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한글을 스스로 폄하하면서 세계 속에 K-브랜드를 자랑하는 것은 모순이자 사상누각일 뿐이다.
이제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국민 모두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첫째, 정부와 국회는 법적·제도적 강제력을 확보해야 한다. 공공기관의 정책 용어와 행정 문서에서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을 근절하고, 쉬운 우리말 사용을 의무화하는 감독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법령으로 규정된 한글 병기 의무를 위반하는 상업 간판과 메뉴판에 대해서도 계도와 실질적인 행정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둘째, 언론과 교육계, 문화계가 앞장서서 ‘K-한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 한글의 우수성을 단순히 한글날 하루만 되새기는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우리말을 품격 있게 사용하는 문화가 곧 교양이요 국격이라는 인식을 국민적 범사회 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
자기 나라의 언어를 잃어버리는 것은 나라의 영혼을 잃는 것과 같다.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 수준의 문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외래어의 그늘에 가려 자국민을 문맹 아닌 문맹으로 만드는 우를 더 이상 범해서는 안 된다. K-기술과 K-문화의 폭발적 성장에 발맞추어, 이제는 우리 언어의 자존심인 ‘K-한글’을 바로 세워 세계 지구촌에 당당히 홍보하고 승화시켜야 할 때다.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온 국민의 결단과 실천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