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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만의 왕릉 이야기④ - 건원릉(健元陵)] 이성계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6월 05일
 
< 강경만 / 공인노무사 >
 
1. 건원릉 답사를 시작하며 

답사일 : 2026. 4. 25.
조선의 역사를 품은 곳, 동구릉. 구리시 검암산 자락 가장 깊숙한 곳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건원릉이 자리하고 있다. 건원릉의 의미는 굳셀 건, 으뜸 원, 언덕 릉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한다 는 뜻이다.

2. 이성계는 그는 누구인가?

이성계는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시대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나 군인으로서 황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며 일약 국민적 스타로 떠올라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최영,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정도전 조준 등 신흥사대부의 추대를 받아 1392년 7월 17일, 고려 수도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며 새로운 시대를 개국하였다.

7년의 재위 기간 동안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등등 500년 조선 왕조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그러나 1398년 1차 왕자의 난으로 5남 이방원에게 정치적 동반자 정도전과 세자 방석이 죽임을 당하자 삶의 의욕을 잃고 1401년 고향 함흥으로 낙향하여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중 방원이 보낸 신하들을 죽여 함흥차사의 유래가 되었다.

본래 태조는 먼저 떠난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현 덕수궁 영국대사관 자리) 옆에 함께 묻히기를 원했다. 하지만 1408년 태조가 승하하자, 아들 이방원(태종)은 부친을 당시 양주고을 검암산에 모셨다.

태종은 자신의 친모인 신의왕후 한씨가 개성에 묻혀 있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잠드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종은 도성 안에 있던 신덕왕후의 정릉을 도성 밖(현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자각을 헐어 그 목재와 석재를 청계천 수표교와 태평관을 짓는 데 사용했고, 봉분까지 깎아 무덤의 흔적을 없애려 했을 만큼 계모 신덕왕후 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3. 건원릉의 천작지구

건원릉의 가장 큰 특징은 봉분 위에 잔디가 아닌 억새풀 (청완)이 덮여 있다는 점이다. "고향 영흥에서 자라는 억새를 심어달라" 죽어서도 고향을 그리워한 태조의 유언에 따라 함경도의 흙과 억새를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풍습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건원릉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광경이다. 건원릉은 단릉 형식으로 병풍석을 두르고 있으며,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호 등 정교한 석물들이 잘 배치되어 있다.

특히 비각 안에는 두 기의 커다란 비석이 있어 눈길을 끈다. <건원릉 신도비>는 태조의 생애와 조선 건국 과정을 기록한 비석이다. 고려의 양식을 벗어나 명나라의 전통을 받아들인 과도기적 형태를 띠고 있어 역사학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로 조선 왕릉 중 신도비가 있는 곳은 태조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이다. 또한 <대한태조고황제비>는 훗날 고종 황제가 태조를 '고황제'로 추존하며 세운 상징적인 비석이다.

오늘날 구리시 검안산 아래 자리잡은 동구릉은 천하의 풍수명당이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이 와서 산세를 보고 '어찌 이와 같은 천작지구(天作地區)가 있는가 필시 조산(造山)일 것' 이라고 찬탄했을 정도로 뛰어난 명당 자리라고 한다. 다만, 태조의 수릉(살아서 미리 잡아놓은 능)은 강씨가 묻힌 덕수궁 정릉이었다.

4. 건원릉에서 근심을 잊다

왕들의 산책길 건원릉에 올라가려면 숨 한번 크게 쉬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간다는 각오로 올라야 한다. 동구릉을 두고 이성계가 절친 무학대사와 함께 미리 잡은 명당이며 태조가 이곳을 얻고 기뻐서 근심을 잊었다해서 망우리(忘憂里)라는 지명이 유래됐다는 야사가 전해오고 있다. 이성계가 자신의 수릉으로 잡았던 것은 정릉이고, 현재의 동구릉은 태종 방원이 잡은 자리다.

당시 태종의 명으로 경기도 파주, 고양 등지에서 좋은 길지를 물색하던 중 김인귀가 이곳의 길지를 추천해 영의정부사 하륜 등에 의해 정해진 곳이 지금의 동구릉이다. 문득 영화 관상의 명대사와 동해바다 하조대가 연상되며, 하륜 왈, 파도만 보지말고 바람도 보았는가?

5. 건원릉의 가치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건원릉에만 나타나는 네모난 돌 정중석은 불교 양식으로 절을 하던 곳이다. 거대한 신도비가 있는 비각. 신도비는 조선 왕릉 초기 양식이다. 건원릉에 남아 있는 신도비는 문종 때부터 왕은 국사에 기록되니 신도비를 세울 필요 없다고 해서 이후 사라진다. 문종 이후의 조선왕릉에 신도비는 볼 수 없다.

6. 아버지와 아들의 해후

아들과 원수처럼 극적인 갈등을 보였던 태조 이성계, 외견상 아들 방원보다는 이성계가 나약하고 감성적인 인물로 느껴지나 이성계에 대한 평가는 개개인에게 달렸지만 냉혹한 철의 남자인 방원과 달리 버들잎 따서 물바가지에 띄워준 강비에게 반한 이성계에게 새삼 연민을 느낀다. 인간적인 입장에서야 이성계나 이방원이나 용서가 안 되지만 용은 오직 한 사람이지 둘이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백번 양보하여 이성계를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이유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잉태한 왕조라는 감상적인 이유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민이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세종대왕이라서, 아니면 수백 년 후 인터넷 시대를 내다보고 자음모음으로 구성된 과학적인 이진법 언어를 세종대왕이 반포하지 않았다면 결코 우리가 IT강국이 되지 못했을 거라는 놀라운 혜안이기에.
* 출처 : 오마이뉴스, 한성희 씀

7. 건원릉 답사를 마치며
 
조선을 개창한 영웅, 이성계. 고려의 장수와 조선의 건국자 사이에서 무게중심이 심하다. 어쨌든 조선의 시작을 품은 곳 동구릉, 그가 잠든 건원릉의 억새 물결 속에서 고려의 끝과 조선의 시작, 그리고 조선의 흥망성쇠의 역사을 추체험 해 본다.

< 건원릉 안내판 >
< 건원릉 전경 >
< 건원릉 >
< 건원릉 >
< 건원릉 >
< 건원릉 >

<​ 강경만 / 한솔노무사사무소 대표, 포천신문 자문위원회 부위원장 >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6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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