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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정영옥] 멸종하지 않는 것들

-『경험의 멸종』을 읽고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2월 26일
 
< 정영옥 / 포천신문 주부명예기자 >
 
‘멸종’이라는 단어가 먼저 마음을 건드렸다. 공룡이나 사라진 종(種)에 붙어야 할 말이, 이제 우리의 일상 앞에 붙는다니. 경험이 멸종한다는 주장 앞에서 나는 잠시 멈췄다. 정말 그런가. 아니면 우리가 경험을 다루는 방식이 바뀐 것일까.

나는 유년 시절, 늘 사물의 뒷모습을 보며 자랐다. 특히 새벽 4시 30분 이후의 시간. 부엌 불이 먼저 켜지고, 물이 끓고, 하루가 조용히 시작되던 그 시각. 어머니의 등을 바라보며 하루를 배웠다. 얼굴보다 등을 더 오래 보았다. 말보다 침묵을 더 오래 들었다.

경험은 그때 이벤트가 아니었다. 반복이었다. 쌀을 씻는 손의 움직임, 국이 끓는 냄새, 겨울 새벽의 서늘한 공기. 몸이 먼저 알고, 언어는 나중에 따라왔다. 그 축적이 나를 만들었다.

이 책은 디지털 기술이 확장되며 인간의 직접 경험이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본다’. 그러나 덜 ‘겪는다’. 화면은 세계를 빠르게 보여주지만, 몸을 현장에서 철수시키기도 한다. 편리함은 커졌지만 감각은 얇아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단정하지 않으려 한다. 경험이 멸종한다기보다, 경험의 결이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감각을 통과하지 않은 정보가 쌓이고, 몸의 시간이 생략되는 사회. 문제는 기술 그 자체라기보다, 우리가 몸을 어떻게 다시 참여시킬 것인가에 달려 있다.

마종기의 「우화의 강」을 떠올린다. 강은 흐르고, 보는 위치에 따라 풍경이 달라진다. 유년의 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았고, 지금의 나는 그 노동의 구조와 침묵의 의미까지 함께 본다.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보는 시선.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런 시선일지 모른다.

경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압축된다. 열어보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당신의 새벽 4시 30분은 무엇이었는가. 당신이 멸종시키고 싶지 않은 감각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손이 먼저 움직였던 순간은 언제인가.

포천은 여전히 손으로 농사를 짓고, 발로 산을 오르고, 얼굴을 맞대고 인사를 나누는 도시다. 우리는 아직 몸의 기억을 갖고 있다. 그 자산을 지키는 일은 거창하지 않다. 한 끼를 함께 나누고, 아이의 눈을 오래 바라보고, 누군가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어머니는 지금도 나의 붓끝 화두다. 글을 쓰다 보면 결국 그 새벽의 등으로 돌아간다. 경험은 멸종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등을 돌렸을 뿐이다. 이제는 다시, 사물의 뒷모습을 볼 시간이다.

< 정영옥 / 포천신문 주부명예기자 >

* 칼럼 및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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