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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희 / 포천신문사 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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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에서 쫓겨나 역사의 패배자가 된 광해군에게서도 외교에 대해선 배워야 한다. 광해군의 66년의 일생은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조선 반도는 외국 군에 네 차례나 침략을 당하여 참혹하고 비참했다.
왕 세자 였을 때는 칼을 들고 왜군과 싸웠고, 왕으로 재임 중엔 명 나라와 후 금 사이에서 핍박을 당해야 했다. 못난 인조에게 왕권을 빼앗긴 뒤엔 유배지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지켜보아야 했다. 한국사에서 광해군보다 외세의 침략을 더 혹독하게 당한 정치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광해군이 살았던 시대는 동북아의 겪동기였다. 광해군이 태어난 이듬해인 1576년 일본에선 오다 노부나가 집권했고, 9살 때는 여진족 누루하치가 거병했다. 누루하치는 5년 뒤 여진을 통일했고, 그 2년 후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했다.
이때 조선은 바람 앞에 등불이었지만 조선의 정치 지도자들은 현재와 비슷하게 모두 무능하고 무책임했다. 무능한 선조는 시인이었다. 군사도 몰랐고, 외교엔 문외한이었다. 각료들은 붕당을 지어 정치 토론만 했다. 모두 성리학을 공부했으니 말들은 청산유수였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도망갔다. 명 나라로 망명하기엔 가장 좋은 곳 이었다. 광해군이 이때 본 것은 정치 지도자의 기회주의적 행태였고, 나라가 힘이 없으면 백성이 희생하고 고생해야 한다는 가슴 아픈 진리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광해군이었기에 그는 성공한 임금이 됐어야 했다. 그래서 위태로운 조선의 사직을 구했어야 했다. 그가 제대로 했다면 이후 조선이 외세에 침략당하고 나라를 빼앗기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는 참혹사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1608년 왕위에 오른 그는 15년 만에 인조 반정으로 쫓겨나야 했다. 왜 패자가 됐어야 했는가. 실패 요인은 세 가지로 꼽을 수 있다.
그것은 첫째, 현 정치도 마찬가지인 코드 정치를 말하고 싶다. 광해군은 잠시 탕평인사를 하는가 싶더니 집권의 대부분을 간신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와 함께했다. 결국 찬밥신세가 된 서인파에게 쿠데타 명분을 주고 말았다.
둘째, 민생 정치의 외면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민심이 피페했지만 그는 왕실 강화에 올인 했다. 경제를 살리기는 커녕 궁궐 중건에 매달려 민심은 멀어져 갔다.
셋째,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는 <폐모실제>를 자행,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 것으로 지탄받았다.
그나마 나은 것은 외교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는 외교를 국가 생존 차원에서 접근, 자존심과 명분론을 버리고 철저한 현실 외교를 택했다. 당시 명(明)나라는 서산에 지는 해였으나 여전히 강자였기에 구슬리고 조심스럽게 대했다. 동북아의 새 강자 후금에겐 유화책을 구사했다.
두 나라엔 첩자를 보내고 수시로 사신을 보내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굴욕감을 참아내며 일본과도 국교를 재개했다. 남쪽 국경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겐 반면교사라 하겠다. 실패한 광해군의 치세와 현실 외교는 배울 점이 많다. 민심을 저버리는 <올인>정치는 모든 역사에서 실패했다.
외교 노선에 명분론과 이념이 섞이면 생존할 수가 없다. 오늘의 미국과 중국 사이의 동북아 정세는 그때 보다 더욱 복잡하고 격동적이라 하겠다. 반미와 친중을 외치는 외교는 없어야 할 최악의 저 차원이다. 광해군의 외교 역사에서 공부 좀 하기 바란다. 친명(親明)을 하여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불러들여 나라를 망친 못난 임금 인조를 본받지는 말아야 한다.
< 이중희 / 포천신문사 고문 >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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