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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임 / 포천신문 자문위원, 한국영상제작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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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학자 진덕수는 '대학연의'에서 "간신이 나라를 좌지우지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언로를 막아 임금을 저 위에 외로이 혼자 있게 만들어, 맹인처럼 밖을 볼 수 없게 만든 다음에야 그 뜻한 바를 마구 펼쳐냈다"고 했다. 당나라를 대표하는 간신 이임보(李林甫)의 술책이 그런 경우다. '
신당서(新唐書)'에 나오는 일화다. 이임보가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권세를 장악하여 천자의 귀와 눈을 가리고 속였다. 간언 책임을 맡은 관리들은 감히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보궐(補闕·간관) 두진(杜璡)이 글을 올려 잘못된 정사를 논하자 그를 하규(下邽)의 영(令·지방 관리)으로 좌천시켰다.
그런 다음 이임보는 다른 간관(諫官)들을 협박하기를 "밝으신 천자가 위에 계시니 신하들은 그 뜻을 그냥 따르면 되는 것이지 무슨 다른 할 말이 있겠느냐. 너희는 의장대에 줄지어 선 말[仗馬]을 보지 못했느냐. 온종일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3품관의 사료를 먹는데, 한번 소리를 지르면 그놈은 쓰지 않는다.
그다음에는 설사 울지 않는다고 해도 쓰겠는가?" 이 일로 말미암아 간언을 올릴 길이 끊어졌다. 오늘날 간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언론인과 의원이다. 둘 다 말[言]이 생명이다. 언론계에도 이미 울지 못하는 장마(仗馬)들이 생겨났지만, 더 심각한 것은 명색이 민주화 세력이라는 거대 여당 의원들의 침묵이다.
북위(北魏) 사람 조염(趙琰)이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있을 때, 고관이 편지를 보내 청탁을 했다. 그는 물속에 편지를 던져 버리고 이름도 쳐다보지 않았다. 진(晉)나라 공익(孔翊)은 낙양령(洛陽令)으로 있으면서, 뜰에 물그릇을 놓아두고 청탁편지를 모두 물속에 던졌다. 질도(郅都)는 제남(濟南)의 수령이 되어 가서 사사로운 편지는 뜯어보지도 않고, 선물과 청탁을 물리쳤다. 진태(陳泰)는 병주태수(竝州太守)로 있으면서 장안의 귀인들이 보낸 편지를 뜯지도 않고 벽에 걸어두었다. 다시 부름을 받아 올라가자 그 편지를 모두 본인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정수투서(庭水投書)란 말이 생겨난 배경이다.
마준(馬遵)이 개봉윤(開封尹)이 되자 권세가 호족의 청탁이 끊이지 않았다. 손님이 청탁하면 잘 예우해서 면전에서 꺾어 거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후 일 처리는 일절 사사로움 없이 법대로만 처결하였다. 포성현(蒲城縣) 주부(主簿) 진양(陳襄)도 읍내 세족(世族)의 청탁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갑작스레 법으로 다스리지 않고 좋게 타일렀다. 송사(訟事)에는 반드시 몇 사람을 함께 입회케 하여 청탁하는 자가 입을 떼지 못하게 했다.
개봉지부(開封知府) 포증(包拯)은 사사로운 청탁이 절대 통하지 않아 사람들이 그를 염라대왕 포노인(包老人)으로 불렀고, 기주자사(冀州刺史) 왕한(王閑)도 사사로운 편지를 뜯지 않고, 호족들을 용서치 않아 왕독좌(王獨坐)로 불렸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정치권 풍경은 어떠한가. 굳이 홍주목사 유의(柳誼)와 금정찰방으로 내려가 있을 때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이다.
다산 정약용이 금정찰방으로 내려가 있을 때 홍주목사 유의(柳誼)에게 편지를 보내 공사(公事)를 의논코자 했다. 그런데 끝내 답장이 없었다. 뒤에 만나 왜 답장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벼슬에 있을 때는 내가 본래 사적인 편지를 뜯어보지 않소”하고 대답했다. 심부름 하는 아이를 불러 편지 상자를 쏟게 하자, 봉함을 뜯지 않은 편지가 수북했다.
모두 조정의 귀인들이 보낸 것이었다. 다산이 입이 나와 말했다. “그래도 내 편지는 공사(公事)였소.” “그러면 공문으로 보냈어야지.” “비밀스러운 내용이라 그랬소.” “그러면 비밀공문이라고 썼어야지.” 다산이 아무 말도 못했다. ‘목민심서’ ‘율기(律己)’ 중 ‘병객(屛客)’에 나온다. 위정자들의 몸가짐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지 않는가.
< 이규임 / 포천신문 자문위원, 한국영상제작학회 명예회장 >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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