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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칼럼] 최초의 특수교육을 받은 오봉래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3년 04월 11일
 
 박창진 사회복지학 박사  
오봉래는 기독교인이었던 오석형을 아버지로 둔 시각장애인이였다. 그의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서른이 조금 넘은 나이에 1919년 사망했다고 한다. (1918년이라는 기록도 있어서 사망한 날자가 정확하지는 않다) 현대사회에서도 시각장애인들이 직업을 얻기란 매우 어렵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애로 인해 본인들이 원하는 일을 하기에는 우리나라 사회적 환경의 벽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여, 대부분 안마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신체적 악조건을 뚫고 사업을 하거나 드물게는 대학교수, 특수교사, 연예인, 법조인 등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지만 극히 미약한 숫자이다. 이유는 첫째가 교육의 부재요, 둘째는 사회환경의 문제이고, 셋째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인식에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벽이 높으며 일반인들 또한 그들을 수용하려는 자세나 시각장애인을 바라보는 인식이 낮은 까닭이리라. 그러니 오봉래가 출생했던 그 시절은 더 말 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구한말 시대에 시각장애인들이 장애인 특수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매우 경이로운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선교사였던 로제타 셔우드 홀 (Rosetta sherwood hall)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홀은 1890년 보구여관(이화여대 부속병원 전신)에 의사로 일을 하다가 1891년 의료선교사로 내한 한 남성과 결혼 후 1894년 남편과 함께 평양으로 이주하여 진료소를 개설하고 의료와 선교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 선교 사업을 돕고 있던 오석형의 딸 오봉래와 만나게 된 것이다.

오봉래는 매우 총명했다. 당시 우리나라만의 점자는 없었다. 그런데 홀 여사는 어렸을 때 뉴욕맹학교에서 배운 맹인 점자법을 배웠다. 조선의 수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맹인교육의 절대 필요성을 느끼고 미국 점자 사용법을 바탕으로 “조선훈맹점자”를 만들고 오봉래를 가르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 하던 중 기름종이를 몇 겹으로 붙여서 바늘로 점을 찍어 가르치고 배웠다. 

이렇듯 열악한 상황이었기에 진도가 매우 느리고 지루했지만 오봉래의 배우고자 하는 열정에 반한 홀 여사의 헌신으로 오봉래는 점자 조선 알파벳을 해독한 뒤에는 눈뜬 사람보다 빠르게 그 배움의 속도가 진행되었다.

한편, 홀 여사는 갑자기 딸을 잃었다. 슬픔을 안고 살던 홀 선교사는 오봉래를 수양딸로 삼았다. 봉래는 1년 만에 어머니인 홀 여사가 준비한 교재를 읽을 수 있었으며 점자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점자로 특수교육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오봉래는 점자의 원리를 해독하자 읽고 쓰는 것은 물론 다른 맹인에게 교습하기에 이르렀다. 홀 여사는 봉래에게 공부뿐만 아니라 뜨개질 등 실생활에 필요한 실용교육까지 받았다. 

또한 홀 여사의 시각장애 소녀들도 정상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교육관에 의해 일반 학생들과 같이 운동, 놀이에 똑같이 참여시켰기에 오봉래는 장애여학생들을 가르치는 특수교사직을 맡게 된다. 1898년부터 공부를 시작한 오봉래는 “평양맹학교”가 설립된 후 첫 번째 학생이자 1회 졸업생이 되었고, 이어서 연합여고를 졸업하고 1900년 초 부터는 맹인여학생들에게 점자를 가르쳤다. 장애인 으로써는 최초의 특수교사가 된 것이다. 

오봉래의 어머니가 된 홀 여사는 특수교육의 절실함을 느끼고 오봉래에게 유학을 가도록 주선하여 1913년 총독부 장학금으로 같은 맹인 인 최신애, 조배녀 등과 함께, 오계산 교사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에서 밴 패튼(Mrs. van patten) 여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일어를 공부하였고 일본 동경에 있는 “동경맹학교”에 유학하여 1917년 동경맹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침술, 구술, 안마술 교육을 받고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조선으로 돌아온 오봉래는 평양맹학교 정식 교사로 발령받아 많은 맹인들에게 특수교육을 가르쳤는데 성격이 온순하고 성실한 그를 보고 당시의 선교사들은 “조선의 헬렌켈러”라고 불렀다고 한다. 누구보다 총명했던 그녀는 영어, 일어, 중국어에도 능숙했는데 홀 여사의 통역으로 일하던 이은혜 수간호사가 병으로 입원 했을 때는 환자들을 위해 통역을 했다고 한다.

홀 여사의 선교일기에는 “처음 점자 읽는 법을 가르쳤던 어린 소녀 오봉래는 이제 여인으로 성장했다. 올해 오봉래는 구약, 역사, 지리, 음악 수업에 많은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어린 시각장애 소녀들에게 읽고, 쓰고, 일하는 법을 가르치는데 사용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그는 맹인 여학생들에게 점자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 필요한 독립생활기술을 가르쳤다. 

당시 시각 장애를 가진 여성들은 가족으로부터 버려져 거지가 되어 살다가 굶어 죽거나 무당의 딸이 되어 굿 을 하기 전 살풀이라는 명목으로 남성들의 잠자리 대상이 되거나, 창기로 살아가는 등 매우 비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기에 오봉래와 같이 특수교육과 고등교육을 받고 살아간다는 건 천운이 아니고는 불가능했다. 그것은 오봉래의 아버지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자로써 선교사로 와 있던 홀 여사를 만났기에 가능한 일 이였다. 

오봉래는 우리나라 시각장애인 교육의 선구자요 최초의 특수교사였다. 암울했던 시대의 태어나 누구보다 배움의 열정을 가지고 공부하여 자신의 처지와 같은 사람들에게 배움의 혜택을 전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1918년 유행성 열병으로 서른이 조금 넘은 젊은 나이에 자신의 꿈을 접고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어머니인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여사는 미국 뉴욕 출신으로 1885년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현 드렉셀대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 선교사가 되기로 서원한다. 졸업 후 뉴욕빈민가에서 자원 의료봉사를 하던 중 남편이 된 윌리엄 제임스 홀 (willam james hall) 박사를 만난다. 

홀 여사는 중국 선교를 희망했으나 이화여자대학병원 전신인 ”보구여관”의 병원장으로 초대되어 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보구여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여성전문병원이다. 당시에는 유교 사상으로 인해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는 여성들이 거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 의사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고, 여성 의사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류층 여성의 환자 수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홀 여사의 일기에 의하면 그가 근무한 3년간 1만 4천 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했다고 한다. 홀 여사는 조선의 가부장적 생활행태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럴수록 환자들의 치료에 헌신적이었고, 병원에 오기 힘든 환자가 있다고 하면 왕진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홀 여사는 화상환자를 위해 자신의 피부 30조각을 떼어 내어 이식을 하여 주기까지 했다. 그런 소문이 퍼지자 병원은 환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891년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윌리엄 제임스 홀과 결혼한 후 1894년 평양으로 이주하여 남편이 경영하는 병원에서 부인병 진료소를 개설하고 의료와 선교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1895년 남편의 사망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1897 조선으로 돌아와서 여성과 장애아동들을 위한 여성의료와 시각장애 아동교육을 시작했다. 

1898년 평양여맹학교를 세우면서부터 본격적인 특수교육을 하였다. 홀 선교사는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 결실이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박 에스더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는 서재필 박사였고 박에스더는 두 번째였다. 그녀는 귀국하여 평생 여성 환자들을 치료하며 생애를 보냈다고 한다.
 
홀 여사의 헌신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여자의학 강습소를 설립하여(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국내에서 교육 시켜 11명의 의사를 배출했다. 평생을 조선을 위해 헌신했던 “로제타 셔우드 홀” 여사는 1933년 건강이 악화되어 선교활동을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귀국하여 1951년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현재 남, 딸, 아들과 함께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잠들어 있다.

홀 여사의 아들 셔우드 홀, 그는 어머니가 일하던 보구여관에서 출생했는데 그것은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정신을 이어받아 결핵 퇴치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국내에 크리스마스 씰(christmas seal)을 최초로 도입하기도 했다.

로제타 홀 한글점자교재 문화재 등록
로제타 홀 한글점자 교재는 1897년 창안한 한글점자(4점식)를 사용해 배재학당의 한글 학습서인 “초학언문”의 내용 일부를 수록한 교재로, 기름먹인 두꺼운 한지에 바늘로 구멍을 내어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2022년 홀 여사의 선교 일기장을 바탕으로 장애에 대한 인식과 싸움, 여성과 사회, 일제강점기 정치, 종교 문제를 홀 선교사의 시점으로 풀어낸 연극 “로제타”가 공연되어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어가고 있다.

박창진/ 사회복지학 박사, 사회복지법인 “이웃과 함께” 대표이사, 꿈이 있는 마을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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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3년 0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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