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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천신문 |
| 위정자에게 역사와 국민은 가장 준엄하고 두려운 심판자이다.
1452년(단종 즉위년) 7월 세종실록을 편찬하려고 사초(史草)를 들춰보던 지춘추관사 정인지는 깜짝 놀랐다. 세종 때의 사관 이호문이 ‘황희 정승’을 주제로 쓴 사초에 어마어마한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황희가 대사헌 때 승려 설우에게서 황금을 뇌물로 받아 '황금 대사헌' 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황희는 곤경에 처한 나머지 "도와 주세요"라고 찾아온 역적 박포의 아내와 간통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형 스캔들에다가 또 황희가 “매관 매직했으며 자신에게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몰래 중상모략 했다고”까지 기록돼 있었다.
정인지는 “아니야 이건 듣도 보도 못한 얘기야”라며 황보인 등을 불러 편수관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정인지는 “황희와 오랜지기였던 우리도 모르는 내용인데 라며 중상모략이 틀림없어요. 간통사건만 해도 그렇지. 아니 규방의 은밀한 일을 이호문이 어찌 안단 말입니까?”라고 말했다.
결국 사관 이호문의 사감(私感)이 개입된 "악의적인 사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정인지 등은 "근거가 없는데도 고칠 수 없다면 직필(直筆)이라 할 수 없다"며 삭제를 주장했다. 하지만 황보인ㆍ최항ㆍ정창손 등은 “사초를 삭제하는 선례를 만들면 말세의 폐단이 되니 한 사람이라도 반대를 하면 고칠 수 없다”는 신중론을 제시했다.
결국 이호문의 사초는 삭제되지 않은 채 세종실록 1428년 6월 25일 자에 그대로 실렸다. 사실 실록에 황희를 두고 상반된 시선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1452년(문종 2년)의 '황희 졸기'는 “사람들이 우러러 어진 재상이라 했다"지만.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고 청렴하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실제 황희정승의 청렴성을 의심할 만한 내용들이 실록에는 실려있다. 다만 황금 대사헌이나, 박포 아내 사건 등 대형 스캔들의 진위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세종실록'의 편수관들은 '사관의 기록은 절대 삭제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목이 달아나도 사필은 굽힐 수 없다'(頭可斷 筆不可斷) 고 외친 조선 시대 사관들의 자세였다.
무엇보다 황희 스스로 세종의 파란만장 했던 아버지의 "태종실록을 보고싶다"는 세종의 면전에서 "후세를 위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직언(直言)하는 맹사성의 의견에 동조했다. 만약 황희 정승이 살아 있었어도 이호문의 사초를 삭제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설사 사초를 삭제해도 역사의 평가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3개월도 안 돼 지지율이 30% 미만으로 하락한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는 등 여권의 지지율이 낮게 나오자 여권에선 언론 보도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여권뿐만 아니라 정치권에선 악재가 터지면 언론 보도에 불만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고 심한 경우 기자와 언론사를 형사고소하고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최소한 우리 국민들의 수준은 언론 보도에 따라 집권세력이나 정당, 정치인에 대한 평가를 바꿀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언론의 논조를 바꾸고 불리한 기사를 삭제해도 역사와 국민의 심판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많은 국민들은 여론조사 결과에 대한 의심스러운 마음을 지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고 믿음이 안간다.
이중희 포천문화원 부원장 / 포천신문 고문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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