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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천신문 |
| 우리가 아는 것처럼 뻐꾸기는 따로 둥지를 만들지 않는다. 당연히 어미가 키우지도 않는다. 남의 둥지에다 몰래 알을 낳아 놓으면 다른 새들이 자기 새끼인 줄 알고 키워주는 것이다. 전문용어로는 육아기생, 부화기생(brood parasitism)이라고 하는데, 흔히 탁란(托卵)이라고 한다. 뻐꾸기는 한국에서 알 낳고 새끼를 치는 여름 철새로 겨울은 대만이나 필리핀에서 난다.
탁란을 당하는 새들을 숙주라고 하는데 흔히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 하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라는 속담 뱁새라고 부르는 (붉은머리오목눈이), 알락할미새, 때까치 등이다. 그중 뱁새는 대개 네 개 내외의 알을 낳는다. 그리고 부화를 하기 위해서 알을 품기 시작한다. 숫컷은 망을 보고 암컷 뻐꾸기는 뱁새의 둥지 근처에서 호시탐탐 엿보다가 뱁새가 먹이 활동 등으로 둥지를 비우는 순간 알 한 개를 먹어버리거나, 아니면 물고 나오거나 둥지 밖으로 밀어 떨어뜨린 뒤 자신이 알을 낳아 채워 놓는다. 이 시간이 10초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니 가히 전광석화 같이 해치우는 것이다.
기생조인 뻐꾸기 세끼는 부화하자마자 주변의 모든 것을 강하게 밀어내는 습성이 있다. 게다가 다른 알이나 새끼를 밀어내기에 안성맞춤처럼 등이 굽어져 있다. 결국 원래 주인보다 덩치가 크기 때문에 둥지에서 밀려난 다른 새끼는 떨어져서 죽고 만다. 만약 같은 둥지에 두 마리의 뻐꾸기 새끼가 태어난다면 서로 상대를 밀어버리기 때문에 진 쪽은 죽고 만다. 남의 둥지를 차지하고 사는 것으로도 부족해 다른 새끼를 죽여야만 살 수 있으니 본능치고는 저주받은 본능이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안타까운 것은 자기 새끼가 밀려 떨어져 죽는 등 둥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스스로 온갖 희생을 감내하면서 뻐꾸기 새끼를 길러낸다. 기른 정의 지극한 모성애인가?
뻐꾸기 새끼는 20~23일 정도 먹이를 받아먹고 둥지를 떠나게 되는데, 그 후에도 10일 정도 더 양육을 받는다. 뻐꾸기나 두견이나 새끼 때부터 크기가 꽤 큰 편이라 다 자라기도 전에 어미 새 보다 서너 배는 커다랗다. 먹이를 먹이는 어미 새가 새끼 뻐꾸기의 입속으로 삼켜질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보다 엄청나게 커버린 새끼의 머리 위까지 올라가서 먹이를 먹이는 양모의 모습은 경외로움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다.
그리고 성장이 끝나면 어미 새에게 날개 짓 까지 배워 날아간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모양도 자신과 확연히 다르고 크기도 엄청 차이가 나는데도 어미 새가 헌신적으로 새끼를 키우는 것을 보면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조류뿐만 아니라 꺽지나 나나니벌 같은 물고기나 곤충 등에도 탁란을 하는 종류가 있다.
보육원에는 생후 3~4개월 되는 아주 어린 아기들이 들어오기도 한다. 이 아기들을 키우는 선생님들은 나이의 고하를 떠나서 모두 엄마의 마음으로 양육한다. 때로는 50을 넘는 사람도 있고 20대 초반의 결혼은 물론 전혀 아이를 키워보지 못한 미혼의 여자 선생님도 있다. 그래서 더욱 세심하게 정성을 다하여 돌본다. 아이들이 아프면 밤을 새워 간호를 하고 이유식도 자기 돈을 들여 직접 만들어서 먹이기도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행동들이다. 아이들이 자라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도 당연히 부모로써 참여한다. 그러다가 아기의 부모 중에 한쪽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아기가 여기에 오게 된 경로는 다양 하지만 부모가 나타났을 때의 이유는 대부분 비슷하다. 사정이 나아져서 얼굴을 보러 오거나 그보다 훨씬 잘되어서 아기를 찾아가려고 온 것이다. 원가정 복귀는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일이다. 어쩔 수 없이 아기들을 맡기고 또 맡겨지게 되지만 우리 같은 시설이 이 땅 위에서 모두 없어져야 정말 좋은 살기 좋은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아가들은 대부분 가족이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좀 쭈뼛거리다가 이내 그 품에 찰싹 안겨서 떨어지지 않는다.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엄마와 아빠임에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천륜이 이끄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뒤도 안 돌아보고 따라나선다. 몇 년 동안 엄마로 살아온 선생님에게 미련 없이 바이바이 손을 흔들며 떠난다. 아이를 보내는 선생님들은 집을 찾아 가는 것이 더 없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부모와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아달라는 염원을 보내지만, 날아가던 제비가 쌩하고 돌아서듯 가버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몇 날 며칠 가슴앓이를 한다. 그러나 그 시간이 길지 않은 것은 아쉬움을 마음에 담아 두기도 전에 또 다른 아이가 이미 와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 시설은 조금 또 다르다. 한번 들어오면 거의 천국 갈 때까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때로는 원장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많다.
시설에는 아주 다양한 이유로 들어온다. 짧게는 십여 년 길게는 20~30년 이상, 그들도 늙으니 환갑잔치도 한다. 그때까지 살아계시는 부모님들은 거의 안 계시다.
처음 자식을, 형제를, 자매를 두고 갈 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때느라 눈물을 흘리며 가는 분들을 본다. 그리고 곧 잊혀진 듯 살아간다. 지금도 보고 싶고 한걸음에 달려오고 싶은 마음이실 텐데 세월이 흐르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것이 세상 이치 인지라...
시설에서 내 집처럼이야 해주겠는가 싶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집보다 나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장애인들은 표현은 안 하지만 그래도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시설에 들어 온지 오래된 클라이언트의 경우 부모가 연로하시거나 돌아가신 분들도 많다. 이제 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안타까운 건 클라이언트 중에는 가족들이 있는지 없는지. 돌아가셨는지 아닌지 조차 인지가 안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가족이 있다는 걸 안다. 왜 안 올까? 언제나 난 집에 가서 살까? 하고 생각한다.
바라기는 장애인 가족들이 자주 방문하여 맡겨진 가족들이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1년 5년 아니, 맡겨진 지 30년이 되었는데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가족들도 있다. 장애인 입장에서 보면 피가 끓는 일이다. 가끔이라도 좀 찾아오시라, 와서 “내가 너의 형이다. 누나다” 하고 안아도 주고 밥도 먹여주고 한 번쯤 목욕도 좀 시켜주시라!
뻐꾸기처럼 애끓는 가슴을 안고만 살아가지 마시고 찾아오시라. 그래서 내가 널 잊지 않고 살아가노라고 손이라도 잡아주시라, 그리고 더 늦지 않게 오시라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생명이 유한한 우리는 아차 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래도 우리는 일을 한다. 탁란이 됐든지 그렇지 않든지, 잘 키워서 이 사회에서 세금 또박또박 내고 타인에게 유익이 되는, 마음도 신체도 건강한 사람으로만 자라기를 바라면서, 또는 함께 사는 장애인들이 하나님을 영접하고 즐겁게 살다가 천국 가는 그날까지....
올여름 뻐꾸기 울음소리가 유난히 서글프게 들린다. 정말 슬퍼서 우는 것일까?
박창진 / 사회복지학 박사, 사회복지법인 ”이웃과 함께“ 이사장, 꿈이 있는 마을 원장, 한국문인협회회원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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