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삼은(高麗 三隱) 즉, 고려 말엽의 학자 3인의 호(號)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은(隱)을 따서 ‘고려의 삼은’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도은 이숭인 대신 길재 야은(吉再 冶隱)을 넣기도 한다.
이들은 동시대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충신이었으며, 원(元)에서 들어온 성리학을 연구하여 조선조의 성리학 기초를 확립한 유학자들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끝까지 절조(節操)를 지켜서 살아남은 사람들 이었는데 후진을 교육시켜 학통을 유지시켰다, 특히, 길재의 성리학이 이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색은 목은으로 천재였다. 고려 공양왕 2년(1353) 향시(鄕試)에 장원 급제하였고, 회시(會試)에도 장원, 전시(殿試)에도 2등을 하였는가 하면 개혁적인 인물로 개인정치의 소굴인 정방을 폐지하고 유학에 의거한 3년상을 처음 실시케 하였다. 또, 성균관대사성이 되어(1367) 학칙을 개정하고 김구용, 정몽주, 이숭인 등을 학관(學官 지금의 교수)으로 채용, 1373년에는 한산군에 봉해졌으며, 공양왕 3년(1391)에는 한산부원군에 올랐다.
대학자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이 문하(門下)에서 배출되었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使)가 되어 창왕(昌王 고려)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장한 이성계(태조)의 면제 세력이었다. 또, 고려가 망하자 팔도강산을 유람하면서 이씨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였던 거물이었다. ‘너, 이놈 이성계야!’, ‘너 이방원아!’라고 꾸짖던 인물이다.
내 고향 포천의 왕방산 골짜기에다 산신각을 짓고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의 어느 곳이 목은이 은거하며 평생의 연구한 성리학을 내팽겨 치고 산신각에서 신을 받들고 살았던 곳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왕방산(750m)의 최고봉인 국사봉은 옛 부터 영험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어룡리 쪽 기슭에는 이름 모를 돌부처가 남아 있기도 하며, 심곡리 물어고개에는 6.25전까지만 해도 산신각이 있었는데 수염이 길고 흰머리 흩날리는 산신령님이 호랑이를 안고 있는 형상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또, 꽃봉수에서는 연2회 국사당 할머니신 산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산신제사라고 하였다.
호병굴에는 이서방이라는 산신을 모시는 사람이 살았는데 이서방네 집은 병풍바위 옆이었다. 밤이면 꿈속에서 왕방산 수원산을 해와 달을 타고 노닐었으며 꽃구름을 타고 산신령님과 노닌다는 말을 이서방에게 들은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