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향토 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묘역이 웅장하고 넓어서 포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포천 관내 소풍 장소 제1호이고 광릉은 거리 관계로 이용이 드물었다.
포천공립보통학교(포천초등학교 : 현 포천초등학교의 전신)가 군내면 구읍리에서 개교한 이래 매년 마라톤 출발점(포천향교) 반환점(전계대원군 묘소)으로 사랑을 받았다 한다.
전계대원군은 철종의 생부로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이 되었다. 1841년(헌종7년)에 죽은 전계대원군을 대원군으로 봉하고 양주에 있던 묘를 현재 위치인 선단리 산 41번지로 옮겼다. 그 이유는 세조의 능인 광릉을 참배하고 귀경하는 길에 철종이 축성령 고갯마루에서 전계대원군 묘를 가까이서 바라다 볼 수 있는 위치에다 명당을 골라 이장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광릉을 참배하고 귀경하던 임금님들은 축석령에서 시도 짓고 쉬었다 갔으며 임금님의 탄 덩을 바라본 모든 관리들은 벼슬의 계급을 1등급씩 올려 주었으며 일반 백성들도 1등급씩 신분 상승의 은전을 입었으며, 70이 넘은 노인들에게는 특별히 선물을 하사하였는가 하면 10명 내외의 선비들을 현감에게 추천 받아 서울에서 과거를 보아 벼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니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임금님의 행차시 은전이며 결단이었다.
전계댜원군의 묘는 왕의 준하는 묘소와 묘막이 만들어지고 정1품에 해당하는 신도비(직경7m 높이2m의 묘와 신도비는 장방형)와 비각이 있다. 제각도 팔각지붕으로 한식 골기와를 얹었으며 3간*2간의 규모이다.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묘를 관리하는 재실이 99간 집으로 임금님이 사시는 궁궐 버금가는 규모였으며 아주 오래 보존이 잘 된 꽃나무들이 즐비하고 수목이 잘 가꾸어져 그 규모에 놀랐던 생각이 난다(6.25 전).
아들이 잘 되어 상감의 자리에 올랐던 관계로 죽어서도 영화를 누린 예라고 할 수 있다. 대원군과 부대부인 칭호를 받았으니 영의정 대우였으며 후손들도 함께 영화를 누렸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철종 자신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나무꾼 출신으로 임금이 되자 궁중 생활 예법은 물론 당신 공용어였던 한문공부도 하고 겨우 임금 노릇을 할만하게 되자 병을 얻어 자손 한명 남기지 못한 채 죽고만다.
전계대원군 묘소를 향해 능묘 다음가는 묘 조성의 현장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연구하고 묘원을 공원화 하여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요즘 ‘스토리 문화’시대라고 하지 않던가? 철종(아명 원범)의 나무꾼에서 임금이 된 벼락 왕위 과정을 휘화화하는 문화사업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