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상대가 상황과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경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헛짚었다’는 말이다. 봉(封)은 圭(홀 규)와 寸(마디 촌)으로 이루어진 글자로 ‘국경에 경계로 삼는 나무를 심다’라는 뜻이다. 국경에 나무를 심고 영토를 주어 제후로 삼는다는 의미로 ‘봉하다’, ‘북돋다’의 뜻을 지닌다. 창(窓)은 의미요소로 구멍의 뜻인 穴(혈)과 발음요소인 囱(천장 창)이 더해진 글자로 ‘창문’의 뜻이다. 본래는 囱이었다. 봉창(封窓)은 ‘창문을 봉함’으로 여닫을 수 없는 창문이다. 그런데 그런 창문을 잠결에 알아채지 못하고 열고자 더듬거리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와언(訛言)은 거짓되고 과장된 말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요즘 세태)世態)를 보면 와언이란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송나라 유학자 진덕수(眞德秀)는 와언을 이렇게 풀고 있다.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며, 충성을 간사함으로 만들고, 간사함을 충성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와언이다.” 와언이 기승을 부리면 결국 군자와 소인의 자리가 바뀌고 그릇됨과 바름이 뒤섞여 자주 찾아오는 된서리는 재이(災異)에도 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덕수는 1000년 전의 사람이다. 그때 사람이 풀이한 이야기가 2020년 그 머나먼 대한민국에서도 회자(膾炙)되고 있으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
와언은 궤변(詭辯)과 통하는 말이다. 궤변은 얼핏 보기엔 그럴듯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비(是非)가 전도(顚倒)되고, 흑백(黑白)이 섞여 있다. 사람의 마음을 혼미하게 만들고, 결국 빠져들게 한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오종세가(五宗世家)에서 “팽조(彭祖)는 교묘한 말과 꾸미는 낯빛으로 지나치게 아첨한다. 속이 깊고 법률에 밝아, 궤변으로 마음을 빼앗는다(彭祖, 爲人巧佞 卑諂, 足恭而心刻深, 好法律, 持詭辯以中人)”고 전한다. 궤변은 무단(武斷)이나 요언(謠言)이 아니다. 무단과 요언은 마음을 끌지 못하나 궤변은 왜곡된 근거를 여럿 동원하기 때문에 미혹(迷惑)하는 힘이 강하다.
궤변의 바탕에는 궤휼(詭譎)이 깔려 있다. 궤휼은 기이하고 기괴하며, 헷갈리게 만들고, 종잡을 수 없다는 의미다. 음모, 간계, 교활의 뜻도 묻어 있다. 작금의 위정자들은 비범한 조어(造語) 능력으로 몽환적인 세계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궤변의 달인들이라 할만하다. 궤변으로 이름 높은 한 지도자가 대선 결과에 불복하자 한동안 시끄러웠다. 행정 공백으로 시민들이 신음해도 그들은 끄덕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은 어떠한가? 우리 주변에도 궤변에 능한 지도자가 드물지 않다. 얼른 보기에는 그럴듯하나 찬찬히 뜯어보면 그게 아니다. 속에는 거짓으로 꽉 차있기 때문이다. 속임수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업장(業障)이란 말이 있다. 업보(業報)와 장애(障碍)의 준 말이다. 업보는 불교에서 전세(前世)의 악업(惡業)으로 말미암아 받은 갚음을 이르는 말이다. 오늘의 자신은 자신이 전세에 지은 결과(結果)라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한 사람은 복(福)을 받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벌(罰)을 받게 돼 있다는 것이다. 장애(障碍)는 무슨 일을 하는데 거치적거리어 방해가 되는 일이나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장애를 남의 탓으로 돌린다. 그런데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라. 왜 그런 일이 나에게 닥쳐오는가. 원인은 나한테 있는 것이다. 내가 잘하면 남도 잘하는 것이고 내가 못하면 남도 못하는 것이다.
형식을 빛내주는 것은 진실(眞實)한 마음이다. 정직하게 일하고 저축하면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데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와언과 궤변이 판을 치고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기 때문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와언과 궤변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깨어 있어야한다. 국민이 깨어 있어야한다. 위정자들의 와언과 궤변에 넘어가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억장(億丈)이 무너지는 일을 당하지 않도록 자성하고 자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