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합 UN은 1981년을 ‘세계장애인의 해’로 제정하였다. 하여 우리나라에도 장애인복지 관련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며 법적으로 이날을 기념일로 만들었다. 또 UN은 92년부터 매년 12월 3일을 세계장애인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날을 세계장애인의 날로 지킨다.
나라마다 장애인의 날은 모두 다르다. 일본은 12월 9일. 중국은 5월 15일을 자국의 장애인의 날로 지키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나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에서는 별도의 장애인의 날을 지키지 않는다. 미국은 매년 9월 셋째 주간을 통상적으로 재활 주간으로 지키며 이 주간에는 각종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 특별히 대통령의 장애인 재활과 복지, 그리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하고 실행방안을 알리고 선도하는 기간이다.
우리나라의 장애인의 날은 매년 4월 20일이며, 대한민국의 법정 기념일이다. 장애인복지법 제14조(장애인의 날)에는 ‘첫 번째로, 장애인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깊게 하고 장애인의 재활의욕을 높이기 위하여 매년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하며, 장애인의 날부터 1주간을 장애인 주간으로 해야 한다. 두 번째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장애인의 날의 취지에 맞는 행사 등 사업을 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되어있다.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분들께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올해 제40회 장애인의 날 행사는 취소되었다. 코로나19 때문이다. 2014년 34회 장애인의 날은 세월호 사건으로 취소됐었다.
그동안의 장애인의 날 기념행사는 장애인입장에서는 불편한 구석들이 너무 많았다. 대부분의 행사 개요를 보면 공연과 포상, 그리고 지루한 축사로 이루어졌다. 물론 이날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장애인의 애로사항을 공유하며 장애인에 대한 각종 인식 및 제도적 차원의 실태를 점검해보고 각성해보는 기회로 삼는다는 취지이다. 그러나 제도적 차원의 접근은 대부분 그날을 위하는 명분으로 사용될 뿐 기대되는 효과는 대부분 당일 하루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쳤다.
장애인 차별을 철폐하는 일은 참 요원하다. 아직도 장애인은 의료와 치료로부터 방치되거나 과다한 비용을 부모들이 부담해야 한다. 우리나라 장애인복지법에 장애는 15가지로 분류되어 있다. 그만큼 장애별로 차이가 많이 있다. 당연히 장애에 맞는 개별화된 교육을 받아야 하지만 개별화는커녕 장애인학교조차 없는 지자체가 많아서 일반적인 특수교육조차 받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대기업은 물론 정부기관에서 조차 지키고 있지 않은 의무고용제는 있으나 마나 해서 누구나 원하는 직업을 스스로 선택하길 바라지만 그것은 매우 요원한 일로 장애인들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 또한, 정보화 사회라 칭해지는 현대사회이지만 오히려 각종 정보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자유스럽게 이동할 수 있는 이동권과 시설물에도 아무런 지장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접근법은 과연 얼마나 지켜지고 있을까?
세계보건기구인 WHO에서 추산한 바에 따르면 인구대비 장애인 출현율은 그 나라 국민의 10%이다. 그중 90%가 후천적 장애인으로 선천적 장애보다 훨씬 많다. 2018년 우리나라 장애인 수는 258만 5, 876명(2018년 보건복지부)으로 전체인구대비 5% 정도이다. 세계보건기구의 추산보다 퍼센티지가 낮은 것은 장애분류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미국은 에이즈나 각종 암 등도 장애로 분류된다. 우리나라 장애인 인구 중에 65세 이상 장애인 인구비율은 46.4% 정도로 장애인도 고령화로 치닫고 있어서 향후 장애노인을 위한 정책수립이 시급하다고 본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장애는 ‘나와 관계없어, 저 사람들은 특별한 거야’라고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산업재해나 안전사고, 교통사고 등을 당하면 순식간에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가 있다.
장애인의 날 등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행사가 “장애체험”이다. 휠체어를 타거나 두 눈을 가리고 다녀 보기와 두 귀를 막고 잠시 살아보는 것이다. 이 체험을 해보고는 누구나 이야기한다. “아, 정말 참 힘들게 산다고, 장애인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 문제는 ”이해한다는“ 그 시간이 아주 잠깐이라는 것이다.
- 다음은 휠체어를 탄 어떤 남자지체장애인의 이야기다.
아침에 일을 보러 서울 시내에 나갔다. 점심때가 되어 식당을 찾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찾을 수가 없다. 2시간여를 지나 2시 30분쯤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겨우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식당 하나를 찾았다. 아, 나도 내가 좀 먹고 싶은 걸 먹었으면 좋겠다. 자장면도 막국수도 곱창도, 겨우겨우 고픈 배를 움켜쥐고 아사 직전이 되어서야 내가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창자를 채우는 거 말고 말이다. 헌대, 고픈 배는 또 참으면 된다. 그런데 참아도 참아도 안 되는게 있는데 그건 배설의 문제이다. 소변은 오줌보가 터질 만큼 위급해질 정도가 되어서야 해결이 가능할 때가 많다. 그러나 어쩌다가 외출전에 다 해결했다고 생각됐는데 그리고 음식도 정말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몸에서 위급한 신호가 오는 경우가 있다.
이건 아시다시피 참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럴 때는 관공서나 복지관 또는 큰 쇼핑몰 등을 찾아보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지은지 얼마 안 되는 듯한 큰 건물을 찾아들어간다. 새로 지은 건물에는 법에 의해 장애인 화장실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애인주차장까지 있다면 그건 로또를 맞은 거다. 그러나 그런 행운은 곧 사라진다. 으레 그 주차공간에는 고급승용차가 자리 잡고 있을 때가 많다. 물론 장애인 주차스티커는 없는 차량이다.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차 주인이 건물주인 이시란다. 하긴 조물주 위에 건물주 시라는 데 누가 감히 차를 빼달라고 말을 하겠는가? 이쯤 되면 이제 나도 한계에 다 달아서 얼굴은 창백해지고, 온몸에는 식은땀이 흐른다.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질 때 쯤 아무데나 차를 대고 터질 듯 팽창한 아랫배를 쥐고는 휠체어 바퀴를 굴릴 수밖에...
머리도 좀 내 맘에 들게 자르고 지지고 볶고 싶다. 그냥 되는 데로 자르는 거 말고, 대중목욕탕에 가본지가 언제 인지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쩌다 경사로가 없는 건물 앞에 서서 한숨을 쉬고 있노라면 누군가 도와주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의도야 어찌 됐든 참 고마운 말이다. 그런데 도와주는 거 말고 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시라, 그것이 자존적인 삶이다. 도와줄 사람 없으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똥 싸고 굶어 죽을 때 까지? 어떤 사람은 아 뭐 몸도 불편하신데 힘들게 다니시느냐고 한다. 그따위 말 하지 마시라! 당신 삶인가 내 삶이지. 당신 말대로 사는 것이 사는 건가? 집안에만 콕 틀어박혀서? 그렇게 걱정해 주지 않아도 된다. 그럴리도 없겠지만 내 몸과 같이 사랑해 달라고 하지 않겠다. 다만 세워놓은 법. 그 법대로 집행해 주시라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발효 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턱 하나 없애지 못하고 경사로 하나 제대로 만들지 있는가 말이다.
장애인의 날 즈음에는 온 나라가 장애인을 사랑한다고 난리다. 정치인들도 지식인들도 내 노라 하는 사회지도층 인사들까지 앞을 다투어 그 날 하루 장애인을 사랑하시느라 애들 쓰신다. 다른 날은 안 그랬으니 하루만이라도 그래야 죄책감이 덜 하신지는 모르겠다. 제발 하루만 그리들 요란 떨지 마시고 365일 함께 좀 살아가십시다!
그동안 장애인들이 목이 터져라 외쳤던 장애인등급제가 단계적으로 폐지되는 등 개선이 되어가고는 있지만, 장애인들의 삶의 영역에서 장해물에 넘어지지 않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사회'는 아직 대한민국에선 요원하다.
장애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몸이 좀 불편하거나 생각에 차이가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특별을 넘어 특이하거나 특수한 사람으로 보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그저 당신과 동등(同等)한 사람으로 생각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회의에서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는 그 사회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이 국격(國格)을 당당히 말하려면 장애인이 주변인이 아니라 당당한 이웃으로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제 국민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특히나 소외된 사람들을 내 가족보다 더 사랑하신다고 말끝마다 외치시던 분들이 모두 나서셨다. 또 기대해 본다. 예전처럼 잿밥에만 절하시지 들마시고.
박창진 / 꿈이 있는 마을 원장, 경희대학교 공공대학원 겸임교수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