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동풍(馬耳東風)과 청맹(靑盲)과니’라는 말이 있다. 마이동풍이란 남의 의견(意見)이나 충고(忠告)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흘려버림을 이르는 말이다. 이백(李白)의 시(詩)에 나오는 ‘동풍’과 ‘말의 귀’가 합쳐져 생겨난 말인데 이후 이처럼 세간에 회자(膾炙)된 것이다. 청맹과니란 겉보기에는 멀쩡하면서도 앞을 못 보는 눈을 말한다. 이 역시 그런 사람을 빗대어 세간에서 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청맹과니나 마이동풍은 남의 말을 듣고도 못 알아듣거나 모르는 척 하는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고집불통(固執不通)이거나 아둔하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경우 흔히 그런 말을 듣게 된다.
우리속담에 ‘우이독경(牛耳讀經)’이란 말도 있다. 바로 ‘쇠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다. 소의 귀에 대고 경서(經書)를 읽어봐야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거나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마이동풍이나 마찬가지로 남의 비평(批評)이나 조언(助言)을 귀담아듣지 않고 흘려버린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재난(災難)이나 위기(危機)를 당했을 때는 그리 해서는 안 된다. 고집을 부려서도 안 되고 아둔한 행동을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개인을 떠나 국가 사회에 미치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진언(進言)에 귀 기울이고 전문가(專門家)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역사(歷史)에서 배워야 한다. 지난 일에서 배워야 한다. 낙관론을 버리고 과학과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소련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를 다룬 미국 드라마는 말한다. 첫째 낙관론을 버려라. 체르노빌 폭발사고 직후 지역위원회가 열린다. “주민들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자 원로가 일어선다. “동요하지 말고 국가를 믿으시오. 소개령은 없소. 허위정보를 막으시오.” 참석자들은 손뼉치고 회의장을 나선다. 이 결정으로 주민들은 더 심각한 위험에 빠진다. 폭발이 일어났는데도 “그럴 리 없다”고 낙관론에 매몰된다.
둘째 상황은 순수한 과학자에게 맡겨라. ‘체르노빌’의 주인공은 실존인물인 핵물리학자 레가소프다. 대책회의에서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잘 수습 중”이란 보고에 회의를 마치려는 순간 말석에 앉은 레가소프가 ‘감히’ 발언한다. “원자로 노심(爐心)이 폭발할 겁니다.” 레가소프는 갖은 압박에도 전문가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과학자가 된다는 건 순진무구(純眞無垢)해지는 겁니다.” 진실(眞實)을 눈감을 수 없다는 말이다. 최악의 상황(狀況)까지 가지 않은 것은 그처럼 진실에 몸 바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셋째 권한을 위임하고 보고단계를 줄여라. 체르노빌의 오만(傲慢)하고 무능(無能)한 관료들은 상부에 보고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레가소프의 진정성(眞情性)에 공감한 슈체르비나 장관이 최선을 다해 현장 지원을 했기 때문이다. 관료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위기가 발생했을 땐 보고단계를 생략하고 현장 실무자들이 제때 필요한 일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넷째 현장의 자존심을 믿고 공유하라. 추가 폭발과 방사능 오염을 막은 건 현장에서 맨몸으로 맞선 소방관들과 광부들과 군인들이었다. 중요한 건 간섭과 명령이 아니라 현장의 자존심을 믿고 상황(狀況)을 공유하는 것이다. 보여주는 쇼맨십이 아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을 알고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불쾌하다고 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진실을 외면하면 반드시 그 진실에 보복 당한다는 사실을 명심(銘心)해야 한다.
관중(管仲)은 나라의 근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의염치(禮義廉恥) 네 줄기가 있어 나라를 받들고 있다. 예란 절도를 지키는 것이며 의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며 염이란 잘못을 감싸거나 숨기지 않는 것이며 치는 악행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다. 그 중 한 줄기가 끊어지면 나라가 기울고, 두 줄기가 끊어지면 나라가 위태롭고, 세 줄기가 끊어지면 나라가 엎어지고, 네 줄기가 다 끊어지면 나라가 망한다.” 기시감(旣視感)이 들지 않는가? 돌아가는 시국을 보면서 마이동풍과 청맹과니를 화두(話頭)로 떠올린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