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까닭을 묻는 사람이 많다. 그러다 보니 말도 많고 포천사람은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고 정연(整然)반 논리를 펼치기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왜 반가 즉, 양반이 많은 것일까?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옛 날 임금님들은 춘추(春秋)로 조상의 묘 즉, 왕릉(상왕)을 참배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왔다. 그래서 역대 임금님들은 서울에서 가까운 세조대왕릉 즉, 광릉 참배를 자주 했다.
광릉 참배를 하자면 반드시 축석령을 넘어 현재 광릉을 찾아 가야 했다. 그런데 역대 임금님들은 축석령에서 쉬었다갔다고 한다. 임금님들이 축석령을 넘나들 땐 포천의 백성들이 구름 같이 모여들어 임금님 행차를 향해 예를 올리고 호화찬란한 행렬을 구경하며 환송했다.
“내 행차를 보고 예를 올린 사람은 모두 신분 등급을 한 차씩 올리도록 하여라-”
임금님의 명령을 누가 거역할 것인가. 그래서 중인 계급도 양반이 되어 과거도 보고 하는 것이 관례였다. 노예들이 하는 양반이 될 수는 없었으나 중인이 되어 중인 벼슬인 의관 관상관감이 되기도 하였다. 중인들이 과거를 보겠다고 양반 자격으로 신분 상승이 되어 장안(서울)으로 이사를 갔으나 그 후, 과거를 보았는지 어찌 외었는지 모르게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양반이 되면 세금도 안 내고 국가에서 시행하는 노역도 면제되고 서원, 향교 제례에도 참례하여 양반임을 과시하기도 하고, 고을 원님과 수시로 만날 수 있으니 좋고 나라에서 하사 받은 노예를 부리고 사패지를 경작하며 살게 되니 이보다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내 고향 포천은 양반들이 현감을 가마에 태워다가 축석령 밖에 내다 버리는 행복을 저지르기까지 했다니 그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현감’이라야 겨우 종6품이었으니 말이 현감이지 고을 원님 그릇도 제대로 했겠는가? 전쟁을 치르느라 흉년이 들면 가난하고 백성의 수도 얼마 안 되어 세금도 면제받는 포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