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송을 담당한 관리가 술만 마시며 차일피일 판결을 미뤘다. 참다 못한 농민이 "임금이 착하지 못해서 이런 못된 사람을 수령에 임명했다"고 비난하다 구속됐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이 말했다. "무지한 백성이 어린애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처럼 순진한 짓을 한 것인데 어찌 벌을 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와 같이 세종의 성군다움은 철저한 애민(愛民)정신에 있었다.
가뭄이 심해져도 자신의 잘못을 찾아 반성하면서, 신료들은 임금의 잘못과 정령의 흠과 민생의 고통을 숨김없이 다 말하여 임금이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염려근심하는 지극한 심정에 도움이 되게 하라고 부탁했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생각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군왕이 백성에게 믿음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글 창제도 백성들이 법전을 읽을 줄 몰라 소송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애민정신에서 출발한 것이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다름이 아니라 백성이 자기 뜻을 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당대의 최선진 농업기술 서적과 의약서적들을 펴낸 것도 백성의 생활수준과 복지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과묵하면서도 강한 결단력의 소유자였던 세종대왕이 개혁을 추진하는 데 살얼음을 걷는 듯한 신중함을 보인 것도 개혁에 따른 백성들의 고통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세종대왕이 세제개혁을 위해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소비하고 관료에서 시골 백성에 이르는 17만 명의 여론을 조사한 것은 역사에 없는 일이었다.
쉽게 생각하는 사람은 일을 이루지 못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일을 이룬다는 것이 세종의 개혁철학이었다.
세종의 또 다른 성군다움은 밤을 새워 글을 읽고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던 호학(好學)의 정신에 있었다. 유학의 고전을 넓고 깊게 섭렵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리학 역사학 경제학 법학 군사학 언어학 천문학 수학에 이르기 까지 모든 학문에 손길에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음악에 관해서도 경(磬)돌에 먹줄이 남아 음이 높아진 것을 귀로 듣고 분간할 정도의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고 했다. 이를 바탕으로 세종은 아악(雅樂)을 정리했다.
세종이 문화가 만발한 태평 성세(盛世)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 호학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학문으로 무장한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국가적 과제를 파악하고 이를 강한 주체성으로 추진함으로서 독창적 우리 민족문화를 창조했다.
이슬람 천문학을 적극 수용한 자주적 역법(歷法)체계와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 최첨단 과학기계의 발명은 그 독창적 민족문화의 위대한 본보기였다.
집현전(集賢殿)을 통한 인재 육성과 활자개량을 통한 서적의 보급은 그가 문화창달을 위해 선택한 위대한 결단이었다.
세종이 국가의 영토를 두만강 압록강으로 확장하고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한 것도 웅장한 큰 업적이라 할 것이다. 그는 민족의 문화역량을 국제수준으로 높이면서 단군신화를 새롭게 기록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를 제사지낸 민족자주정신을 드높인 선구자였다.
중국 음운학의 당대 권위자인 세종은 우리 글자인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한 것도 그의 세계화 방식이었던 셈이다.
요순(堯舜)에 비길만한 세종대왕은 도덕적으로도 엄격한 실용주의적 철인(哲人)군주라 할 수 있다. 세종은 우리 민족의 미래에 빛을 던졌던 것이다.
군주제 하의 왕이었던 세종도 이렇게 끊임 없이 공부하고 백성들을 위한 길을 모색하는 정치를 했다. 하지만 최소한 형식ㆍ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된 현재도 일부 철새 정치인들은 끊임 없이 공부하고 국민들을 위한 길을 모색하는 정도(正道)를 걷지 않고 당장의 정치적 이익에 따라 철새 노릇이나 하면서 국가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기는 커녕 자신의 정치 생명을 연장하려 정책과 이념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 여당으로 발길을 돌린다. 국민은 이러한 철새 정치인을 가려 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