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合理)란 말은 많이 들어보았으나 화리(和理)란 말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전(辭典)에 없는 말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장자(莊子)]를 완역한 김정탁 교수는 말한다. “[장자(莊子)]를 통틀어 가슴에 꽂힌 단어 하나를 꼽는다면 ‘화리(和理)’다.
조화로울 화(和)자에, 이치 이(理)자다.” 화리란 전체적인 조화(調和)와 균형(均衡)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바로 ‘큰 지혜(智慧)’를 말하는 것이다. 화리는 동아시아에서 2000년 전부터 썼던 용어이나 지금은 사라진 말이라 한다. 그 대척점에 합리(合理)라는 말이 있다. 합할 합(合)자에, 이치 이(理)자다. 이치에 합당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화리가 ‘큰 지혜’라면 합리는 ‘작은 지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화리보다 합리를 더 좇고 있다. 합리는 옳고 그름을 따진다. 이치에 합당한가를 따지며 자꾸 쪼개고 쪼개서 시시비비를 가른다. 그럴수록 사회는 아군과 적군으로 점점 더 벌어진다. ‘큰 지혜’는 아니다. 시시비비보다 사회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더욱 중시한다. 그게 바로 ‘화리’다. 자연을 보라. 거기에는 태풍도 있고, 지진도 있고, 폭풍우도 있다. 나무도 뽑히고, 심지어 사람도 죽는다. 하지만 지구 전체의 균형을 깨뜨리는 일은 없다. 가끔 태풍이 불어야 심해의 물고기가 산다. 그런데 모든 맥락을 다 끊어버리고 태풍 하나만 보면 어찌 되겠는가?
그래서는 안 된다. ‘작은 지혜’로만 세상을 봐서는 안 된다. ‘큰 지혜’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화리(和理)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지금 고소(告訴) 고발(告發)이 난무(亂舞)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어지럽게 춤추는 사회에 내던져지고 있다. 물론 고소나 고발은 같은 뉴앙스를 풍기는 말이나 차이가 나는 말이다. 고소는 범죄의 피해자나 그 법정 대리인이 수사 기관에 범인의 소추를 요구하는 것이고 고발은 고소권자인 피해자 이외의 사람이 수사 기관에 범죄사실을 신고하고 범인의 기소를 요구하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상화되고 있는가?
고집(固執)과 아집(我執) 때문이다.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때문이다. 신념에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배치되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 말이다. 이를 확증편향이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체리 피킹(cherry-picking)’이란 개념도 나왔다. 일반적으로 확증편향자들은 무수히 많고 혼란된 정보 가운데서도 자기 뜻에 맞는 정보만 골라낸다. 다른 정보를 감추거나 외면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자기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나 자료만 선택적(選擇的)으로 받아들이고 전파한다. 혹세무민(惑世誣民)한다. 마케팅 분야에서는 자신의 실속만 차리는 소비자들의 행태를 지칭(指稱)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고집과 아집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물 안 개구리는 공간에 구속돼 바다를 알지 못하고, 매미는 시간에 구속돼 겨울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지식인은 자신이 아는 바에 구속돼 세계의 참모습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큰 시선’을 갖게 하는 대붕(大鵬)의 비상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시시비비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그런 시시비비를 가장 잘 가린 사람들이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다. 소피스트는 처음에 ‘현자(賢者)’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궤변가(詭辯家)’로 통했다. 그들은 논리적 잣대만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거기에 맹점(盲點)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맥락(脈絡)’이다.
우리는 이웃과 사회와 연결돼 있다.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관계가 있고, 전체적 맥락이 있다. 그런데 그 맥락을 다 끊어버리고 논리와 개념만 따지면 어찌되는가? 공동체가 무너진다. 그래서는 안 된다. 조화와 균형의 화리로 공동체를 이끌어나가야 한다. 대붕(大鵬)의 비상처럼 ‘큰 정치’로 나라를 부흥시켜야 한다. ‘작은 정치’는 적과 동지를 나누며 차이를 극대화하고 ‘큰 정치’는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며 하나로 통합한다. 잘잘못을 따지며 적과 동지를 가르는 ‘합리의 공동체’에서 ‘화리의 공동체’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