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천청성공원에 3·1독립선언비의 건립,시민의 독립정신 선양의 계기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韓日合邦) 후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고 주권회복을 위해서 의병(義兵) · 의사(義士)들이 각지에서 일어났고, 1919년 3월 1일을 기해 2천만 조선민족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3 1독립운동이요 당시 배포한 선언서가 3·1독립선언서이고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했다.
2008년 5월, 포천시에서 간행한 박경자 편저의 <抱川의 독립운동사>에는 선언서에 서명한 권동진(權東鎭)·이종일(李鍾一) 선생의 약전(略傳)과 존영(尊影)이 수록되어 있고, 박동완 선생은 미 수록되었으며, 3·1정신선양회에서 간행한 <獨立宣言書>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포천 출신으로 권동진·이종일·박동완 선생 등 3인의 존영·약전이 등재되어 있는데도 포천에 현충시설이 전무하다시피해서 우선 3·1독립 선언서비라도 건립해서 시민의 독립정신을 고양(高揚)하는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소명감으로 선언서비 건립을 2013.2.8, 포천시를 방문 제안으로 시작하여 5차 제안했다.
2013.2.24, 포천시 · 포천시의회를 각각 방문하여 제안자가 필사(筆寫)한 독립선언서 필사인쇄본(筆寫印刷本)을 일일이 전하면서 청성공원에는 현충시설로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 동상(銅像)을 비롯해 충혼탑·기념비 정도이어서 새로운 현충시설로 독립선언서 비를 세울 것을 연속 국민 제안을 했다.
포천시는 재정적인 자립도가 낮아서 정부의 지원 없이는 건립할 수 없기 때문에 2014.7.18, 경기도북부청사에서 경기도지사 면담을 통해서 지원 요청했으며, 2015.6.6, 현충일에는 각급기관장·보훈단체장·각급의원들에게 선언서비 건립 호소문을 전달하였고, 이어서 2015.12.14, 경기북부보훈지청장을 면담에서 선언서비 건립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청원했다.
2. 독립선언서 서명 33인 중 박동완 선생이 포천출신임을 100년 만에 최초로 고증 5년간 독립선언서의 한자 오자 수정제안으로 탑골공원에 독립선언서 원본의 모사(模寫板)을 건립하게 했으며, 고교 국어교과서 한자오자를 교육부 장관 면담을 통해서 수정제안으로 수정 발행하게 하는 과정에서 선언서 서명 33인에 대해해서 관심을 갖고 <韓國獨立宣言書硏究> 등 10여 권 관련 책자를 접해 33인 중 포천출신이 3인 임을 정확히 규명하겠다는 소명감으로 고증(考證)하게 되었다.
그 동안 17개 관련 문헌자료 고증해서 포천 11개 , 양평 2개 , 포천 · 양평으로 병기(倂記)한 곳이 2개 , 서울(본적) 2개이며, 포천은 호병골, 양평은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로 표기되어 있다. 양평문화원에서 간행한 <양평 3·1운동사>에서 박동완 선생에 관해서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을 비롯한 공공기관에서 간행한 자료에서는 대부분 포천으로 표기하고 있었고, 최종 확인코자 2015.11.4, 서울 마포 합정동 광복회관 내 독립선언서33유족회를 직접 방문해 각종 기록 자료를 확인했다. <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존영>에 따르면 박동완 선생이 포천 호병골 출신이고, 그 밖의 권동진 선생은 충북 괴산, 이종일 선생은 충남 태안 출신으로 각각 확인 했다.
박동완 선생이 100년 동안, 경기 양평 출신으로 인지(認知)하고 있었지만 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일에 포천 출신임을 최종 고증·확정했으니 비록 늦었지만 천만다행하다.
박동완 선생의 유족으로 손자인 박재상과 당일 전화통화로 선생의 출신지가 포천시 호병골임을 전해주었더니 그 동안 양평 출신으로 인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문헌에도 양평으로 기록되고 있다고 했다.
계속 확인한 바 함양박씨(咸陽朴氏) 지평공파(持平公派) 세보(世譜)에서는 선생 조부의 묘가 포천으로 표기되었고, 국립현충원의 애국지사 묘비문에는 포천출신, 3·1운동선언서민족대표33인존영 등 각종 문헌자료를 통해서 재확인하고, 최종적으로 국가보훈처 공훈록에서 확인했으며, 포천시도 국가보훈처에 재확인하여 포천 출신임을 최종 확정 발표했다.
3. 박동완 선생 포천출신으로 독립정신의 선양의 계기, 시민의 숭모사상 고취 오기(誤記)한 내용을 사실(史實)대로 <抱川의 독립운동사> 수정의 국민 제안을 포천시에서 수용하여 2019. 3. 1, 3·1절을 기해서 수정판을 발행해서 시민에게 배포했으니 100년 동안 오기한 역사를 사실(史實)대로 수정하게 되었고, 지난 3월 1일, 3·1운동100주년기념식에 박동완 선생 손자 박재상 내외를 초청해서 선언서 한글 풀이본을 윤독(輪讀) 했으니 실로 감격해 마지않았다.
포천청성공원 충혼탑의 호국영령 3 ·1운동가 중에도 타 지역의 권동진·이종일 선생이 포함되어· 오기된 것을 역사바로세우기로 하루 속히 바로 수정하고 누락된 3·1운동가를 추록할 것을 제안· 촉구해서 2차 수정하게 했다.
포천은 전통적으로 명현과 충신을 다수 배출한 향읍(鄕邑)이라고 우리 시민이 자긍(自矜)하지만 민족대표로 서명한 박동완 선생과 수많은 3·1독립운동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거명된 적도 별로 없거니와 인지하고 있는 시민이 적었지만 앞으로 시민의 새로운 관심, 선열에 대한 숭모, 독립정신 고양의 계기가 되리라 기대한다.
1919년 3 ·1운동 당시 박동완 선생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 대표로써 포천 호병골 출신으로서 독립운동에 적극참가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함양(咸陽) 박씨인 근곡 박동완 선생은 고종 때 기독교 신보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종교생활과 민족사상을 고취하였고, 3·1운동 당시 기독교 대표자로서 서명 날인하여 운동에 적극 참여 활동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소년위원장과 신간회 상임간사로 활동하다가 1923년 하와이로 망명하여 한인교회 목사로 독립운동에 적극 활동하다가 1941.2.23. 작고하였다.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장(受章)하였다.
박동규 / 전 영북고 교장, 경기북부노인지도자대학 학장,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민족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