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초(楚)나라 강왕(康王)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겹오(郟敖)가 왕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초나라 민왕(愍王)이다. 민왕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민왕의 숙부 위(圍)가 재상의 자리에 올라 민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위(圍)의 권세는 민왕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 당시 초나라에 사신으로 와 있던 정(鄭)나라 사람 자우(子羽)는 이렇게 말했다. “소나무와 잣나무 아래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키가 큰 나무로 큰 나무 아래에는 풀이 잘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주위의 양분을 모두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큰 나무 아래에 풀이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권세가 강한 신하가 곁에 있으면 임금은 임금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자우(子羽)는 위(圍)가 조만간 조카의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 내다보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과연 얼마 뒤 민왕이 병들어 자리에 눕자, 위는 병문안을 한다는 핑계로 대궐에 들어가 갓끈으로 민왕을 교살한 뒤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소나무와 잣나무 아래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 한자로는 송백지하(松柏之下) 기초불식(其草不殖)이다. ‘송백지하 기초불식’은 약자가 강자의 곁에서 핍박받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는 부당한 갑을 관계가 만연해 있다. 갑과 을은 원래 계약에 따라 각자의 권리와 의무를 지니는 동등한 관계인데, 이것이 상하관계로 변질되어 갑이 을에게 횡포를 부리는 경우가 많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아파트 입주민과 경비원의 관계도 그렇다. 큰 나무 아래에 풀이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한쪽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다른 한쪽이 필요 이상으로 위축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갑(甲)의 아량에 기대기만 한다면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을(乙)들이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아 갑과의 균형을 맞추어 줄 제도적 장치와 인도적인 배려와 양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