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들어 진언(進言)과 직언(直言)이란 말이 화두가 되고 있다. 진언이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의견을 들어 말하는 것이다. 상사(上司)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직언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키는 하나 그 말이 지니는 뉘앙스(nuance)는 다르다. 갑골문을 보면 直은 눈의 뜻인 目(목)과 수직의 뜻인 丨(곤)으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수직의 막대는 측량 막대이다. 본래 ‘똑바로 보다’의 뜻이며 ‘걷다’, ‘바르다’의 뜻은 파생되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바로보다[正見也]’라 하였다. 바로보고 거리낌 없이 그대로 말하는 것이 직언이란 말이다.
사극 작가 신봉승씨가 조선(朝鮮) 임금 27명과 신하 600여명 가운데 적임자를 골라 ‘드림 내각’을 짜본 일이 있다. 그 가운데 국무총리로 조선 중엽 ‘오리 정승’ 이원익(李元翼) 대감을 뽑았다. 이원익은 여든일곱까지 살며 70년을 공직에 있었다.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領議政)을 다섯 번이나 했다. 그러면서도 노년에 재산이라곤 초가집 한 채였다. 어느 날 인조가 “어떻게 하면 훌륭한 정치를 펼 수 있는가” 묻자 이원익이 대답했다. “성상(聖上)께서는 자신의 견해만 믿고 신하들을 경시하고 독단으로 처리하시는 일이 많아 군신(君臣) 간에 서로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잘 다스리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바른 소리를 서슴지 않는 신하(臣下)나 선비가 많았다. 어사(御史) 박문수는 탕평책(蕩平策)의 성과를 묻는 영조에게 대꾸했다. “홍문관 관원 자리 하나도 끝내 지역의 벽을 넘지 못하니 근래 탕평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거짓 탕평입니다.” 영의정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다. 권세와 영화가 큰 자리일수록 임금에게 듣기 싫은 소리 하는 게 더 어렵고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이원익은 “윗사람은 요체만 총괄하고 세부 일은 아랫사람에게 위임해 성과를 내게 할 수 있어야 다스림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도 했다. 진언과 직언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唐)나라 현종 집권 초기를 중국사의 황금기(黃金期)라고들 한다. 유능하고 강직한 재상(宰相)들이 황제(皇帝)의 잘못을 용서 없이 질타(叱咤)하고 거기에 황제가 귀를 기울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한휴(韓休)도 그런 재상이었다. 어느 날 한휴가 물러간 뒤 현종이 거울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곁에 있던 사람이 “한휴가 재상이 된 뒤 폐하가 더 야위셨습니다”라고 했다. 현종은 “정말 그렇다”고 했다. 그러곤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내가 야윈 만큼 백성은 살쪘을 것이다.” 그 황제에 그 신하가 아닌가. 자리를 걸고 라도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참모(參謀)들이 절실(切實)한 이유이다.
위정자들은 이론과 사실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론은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fact)은 아니다. 이론은 뒤집힐 수 있으나 사실은 뒤집힐 수 없는 것이다. 이 명쾌한 답을 얻어내면서 일본 지성계는 코페르니쿠스적으로 돌변했다. 위정자들이 새겨들을 일이다. 옛날이야기 하나가 더 떠오른다. 칭기스칸이 세상을 떠나자 후계자 오고타이 칸이 명재상 야율초재에게 몽골 제국의 대개혁 방안을 물었을 때의 대답이다.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하고, 한 가지 일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하다.” 8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맞는 얘기 아닌가.
이 시점에서 두려운 것은 천재지변이나 기상재해가 아니다. 뜻 높은 지식인이 세상을 등지고 염치와 도덕이 무너져 못하는 짓이 없으며, 위에서 이익에 눈이 멀자 아래에서 덩달아 설쳐대고, 소인을 군자라고 천거하고 군자를 소인이란 내치게 만드는 상황, 보다 못해 직언을 해도 들은 채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정말 두려운 일이다. 소인의 와언(訛言)쯤은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 하지만 여기에 임금의 독선과 무능이 얹히면 나라는 어찌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