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빙공영사(憑公營私)라는 말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빙공영사란 공적인 일을 빙자(憑藉)하여 개인의 이익을 꾀한다는 말이다. 빙자란 남의 힘을 빌려 그것에 의지함을 말한다. ‘권력을 빙자하여 큰소리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빙(憑)이라는 말이 나쁘게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뜻으로도 사용된다. 빙고(憑考)라는 말이 그렇고 빙신(憑信)이란 말이 그렇다. 빙고란 사실이 정확한가를 여러 가지 근거에 비추어 상세히 검토함을 이르는 말이고 빙신은 남을 믿고 의지함을 이르는 말이다. 영사란 사익(私益)을 꾀한다는 것이다. 공직에 있는 사람이 사익을 앞세운다는 것이다.
사익추구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기는 하다. 그러나 공직에 있는 사람은 그게 아니다. 나라의 녹(祿)을 먹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다. 그들은 공익(公益)을 우선해야 한다. 나라의 공복(公僕)이기 때문이다.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사익을 탐하는 것은 도선자(盜善者)들이 하는 짓이다. 도적의 심보를 지닌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공익을 위한답시고 떠들면서 사익을 취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심(盜心)을 품은 사람들이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을 쓴 사람들이고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권력(權力)을 앞세워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 어찌 되는가.
권력은 권세(權勢)의 힘으로 남을 눌러 복종시킴을 말한다. ‘저울질 한 뒤에야 가볍고 무거움을 안다[權然後知輕重]’는 말이 있다. 권(權)에는 ‘저울 또는 저울질하다’라는 뜻이 숨어 있다는 말이다. 저울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경중(輕重)의 값은 수시로 달라질 수가 있다는 말이다. 권력을 등에 업은 사람들이 어떠해야 하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을 쥔 사람들은 한결같이 천만년 누릴 것으로 착각을 한다. ‘꽃은 열흘 붉지 않고 권력은 십년을 가지 않는다[花無十日紅 權不十年]’고 했다. 권세에 취해있는 위정자들이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들은 공익을 추구(追求)해야 한다. 공익 추구는 고도로 문명화된 행위이다. 문명화되었다는 것은 많은 성현(聖賢)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수많은 독서를 하면서 사색(思索)을 하고, 공동체의 유지와 책무에 대한 비판과 처벌을 통해서 터득되는 경지의 것이다. 물론 쉽게 도달되는 경지는 아니다. 그래서 공익 추구는 공동체로부터 존중(尊重)받았고 사익 추구는 경멸(輕蔑)과 제재를 받았다. 이 지점에서 꾀가 많은 사람은 공익과 사익을 뒤섞는 방법을 활용한다. 이게 바로 '빙공영사'다. 사익을 공익으로 포장하거나 또는 사익을 추구할 때 공적 기관을 동원하는 것이다. 호가호위한다는 말이다.
조선시대 지방자치조직의 규약인 향약(鄕約)에서도 이 부분을 아주 경계하였다. 조선시대 향약의 전범(典範)이 1556년에 제정된 예안향약(禮安鄕約)이다. 여기에 보면 '공적인 임무를 맡은 사람이 공을 빙자하여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受官差任 憑公作私者)'는 엄벌해야 한다고 나온다. '허위 사실을 조작하여 다른 사람을 함정으로 모는 자, 공동체에 환난이 닥쳤는데도 수수방관하는 자도 엄벌에 처한다'로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엄벌은 그 엄벌 대상이 양반이면 만당면책(滿堂面責)이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그 사람을 세워놓고 망신을 주는 방법이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꿀 먹은 벙어리’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박학독행(博學篤行)이란 말이 있다. 빙공영사와 대비되는 말이다. 두루 배우고 진실하게 실천한다는 뜻이다. 여러 분야를 두루 배우며[薄學] 자세히 묻고[審問] 신중히 생각해[愼思] 명확히 분석하고[明辯] 뚝심 있게 실천해[篤行] 나가라는 말이다. 수신제가평천하(修身齊家平天下)라 하지 않았는가. 수신제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달려들면 어찌되겠는가. 양두구육을 하고 나타나는 위선자(僞善者)나 도선자(盜善者)를 경계하고 당리당략(黨利黨略)과 사익만 챙기는 위정자(爲政者)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