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상(日常)은 ‘보기’와 ‘보여주기’로 구성(構成)되어 있다. 본다는 것은 관찰(觀察)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관심(關心)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보여준다는 것은 알린다는 것이고 광고(廣告)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視線)을 의식하는 것이고 타인의 관심을 유도(誘導)하는 것이다. 과시(誇示)하는 것이다. 우리는 늘 타자(打者)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며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한다. 이 알리고 과시하는 행위가 바로 ‘보여주기’다. 보여주기에 몰두(沒頭)하는 자아(自我)는 그만큼 타자에게 인정받지 못했거나 실제로는 인정받고 있으나 아직도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자아다.
이처럼 보여주기 이면은 늘 다양(多樣)한 형태의 열등감(劣等感)으로 연결되어 있다. 열등하다는 것은 우월(優越)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뒤떨어져 있다는 것이고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모자란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보여주기’의 존재(存在)이면서 동시에 ‘보기’의 존재들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리의 동공(瞳孔) 안으로 들어와 우리를 자극(刺戟)한다. 에고(ego)는 생존에 유리한 자극을 받아들이고 생존에 방해가 될 것으로 여겨지는 자극은 거부한다. 여기에 애고의 판단(判斷)이 항상 개입한다. 그런데 이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남 앞에 나서기 전에 먼저 나를 성찰(省察)해야 하는 이유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보여주기’는 소비(消費)하는 행위이고 ‘보기’는 저축(貯蓄)하는 행위이다. 보여주기는 자신을 밖으로 내어놓는 행위이므로 소비하는 행위이다.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우리는 점점 더 가난해진다. 마침내 더 보여줄 것이 없을 때 깊은 열등감이 생겨난다. 반면에 보기는 축적(蓄積)하는 행위다. 많이 볼수록 우리는 더욱 풍요로 워 진다. 선택할 자원(資源)이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이다. 또한 많이 볼수록 애고의 선택과 배제(排除)의 기준도 더욱 깊어지고 그 기술도 향상된다. 보기는 우리를 성숙시킨다. 사고(思考)의 폭을 넓혀주고 사유(思惟)의 깊이를 더해주기 때문이다.
‘보여주기’가 사회 단위에서 극대화(極大化)할 때 ‘스펙터클(spectacle)의 사회’가 형성된다. 스펙타클 사회란 확대되고 포장(包裝)된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잘못된 재현물(再現物)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을 뒤로 미루고 가짜 이미지로 대체(代替)되기 때문이다. 스펙터클의 사회는 거대하고도 강력한 이미지들을 생산함으로써 대중을 압도하고 기만(欺瞞)한다. 그것은 대중을 ‘구경꾼’이자 ‘이미지의 소비자’로 전락시킨다.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가난한 사회일수록 보여주기에 몰두한다. 스펙터클 생산에 몰두한다. 무슨 말이냐? 구호의 현수막(懸垂幕)이 많을수록 문화적으로 가난한 나라란 말이다.
성숙한 자아(自我)는 ‘보여주기’보다 ‘보기’를 좋아한다. 보여주기를 통해 가난해지기보다 보기를 통해 풍요로 워 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보기의 세계는 체험(體驗)의 세계다. 보기의 세계는 지혜(智慧)의 세계다. 보기의 세계는 보고(寶庫)의 세계다. 여행이나 산책 독서하는 시간은 소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축적하는 시간이다. 견문각지(見聞覺知)를 통해 영혼(靈魂)을 살찌우고 육신을 정화(淨化)시킨다. 그것을 통해 영감(靈感)의 세계로 진입한다. 아이디어(idea)의 세계로 돌입한다. 창의(創意)의 세계로 넘어간다. 우아일체(宇我一體)의 도를 체득(體得)한다. 각해일륜(覺海一輪)의 바다로 들어선다.
위정자(爲政者)들은 ‘보여주기’보다 ‘보기’에 힘써야 한다. 말하기보다 듣기에 힘써야 한다. 주장(主張)하기보다 경청(傾聽)해야 한다. 개인보다 사회를 생각하고 당리당략(黨利黨略)보다 국가를 생각해야 한다. 속도(速度)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방향(方向)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향을 싼 종이에선 향내 나고 생선 싼 종이에선 비린내 난다고 했다. 지금 온 나라가 향내 나고 있는가? 비린내 나고 있는가?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