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정시(烏江亭詩) 승패병가불가기(勝敗兵家不可期)-승패는 병가도 기약할 수 없다. 포수인치시남아(包羞忍恥是男兒)-부끄러움을 안고 참는 것이 사나이 강동자제다호걸(江東子弟多豪傑)-강동의 자제는 호걸이 많다. 권토중래미가지(捲土重來未可知))-땅을 말아 거듭 오면 알 수도 없었 을 것을.
오강은 지금 안휘성 화현 동북쪽, 양자강 오른쪽 언덕에 있다. 이 시(詩)는 이곳을 지나던 두목이, 옛날 여기서 한나라 유방의 군사에 패하여 스스로 목을 쳐 죽은 초나라 패왕 항우(項羽)를 생각하여 읊은 시이다. 항우를 모신 사당이 있어 오강묘(烏江廟)의 시라고도 한다. 항우는 해하(垓下)에서 한고조 유방과 최후의 접전에서 패해 이곳으로 혼자 도망쳐 왔다. 이때 오강을 지키던 정장(亭長)은 배를 나루에 대 놓고 항우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항우가 나타나자 이렇게 말했다. 정장은 지금의 파출소장의 역할과 비슷하다.
"강동 땅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십만 인구가 살고 있으므로 충분히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서 배를 타십시오, 소인이 모시고 건너겠습니다."
강동은 양자강 하류로 강남이라고도 하는데, 항우가 처음 군사를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항우는, 「옛날 내가 강동의 8천 젊은이 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행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내 무슨 면목으로 그들 부형을 대한단 말인가?」했다. 항우는 타고 온 말에서 내리자, 그 말은 죽일 수 없다면서 정장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뒤쫓아 온 한나라 군사를 맞아 잠시 최후의 용맹으로 격퇴하다 잠시 틈을 내 자신의 목을 쳐 죽었다. 이 때 항우의 나이 겨우 서른. 그가 처음 일어난 것이 스물 넷 이였으니까, 7년을 천하를 휩쓸고 다니던 그의 최후가 너무도 덧없고 비참했다.
두목(杜牧)은 그의 덧없이 죽어간 젊음과 비참한 최후가 안타까워 이 시를 읊었던 것이다. 「항우여, 그대가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승패라는 것은 아무도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한때의 치욕을 참고 견디는 것, 그것이 사나이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강동의 젊은이들에게는 호걸이 많다. 왜 이왕이면 강동으로 건너가 힘을 기른 다음 다시 한 번 땅을 휘말 듯한 기세로 유방을 반격하지 않았던가. 그랬으면 승패는 아무도 알 수 없었을 것이고, 항우의 천하통일이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하며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 바둑의 인구보다 많다는 장기판의 초한전도 항우를 동정하는 뜻일 것이다. ♣
참고한 자료 : [두목(杜牧 803∼852)-오강정시(烏江亭詩)] [서강대자전-권토중래(捲土重來)]. [이야기 고사성어-장기근 박사 감수 명문당 출판 책 중에서-권토중래(捲土重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