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운’은 어링굴(어룡리)에서 탄생하시여 74세를 사셨다. 북병사 종사관, 구성부사, 삭령부사 등을 역임한 조선 인조조 효자 오백주(吳伯周)의 8대손이시다. 6형제 중, 가장 총명하고 장래성이 있어 부모님이 따로 흰 쌀밥을 먹여 키웠으나 다른 형제들은 가난하여 조기 사망해서 독자로 사셨다.
포천 보통학교를 졸업(4회) 하시고 심선생께 한문, 수학을 사숙하셨는데 당시, 현존 한학서적은 두루 탐습 통달하여 신동(神童)이라 칭송받았으며 명필(名筆)로 유명했다.
17년간 공직에 머물렀으나 퇴임 후, ‘송운 서당(松雲 書堂)’을 설립, 후학(後學)을 길렀다. 봄, 여름, 가을 3계절 복장굴 한내천 가에서 포천 유림들을 모아 시회(詩會)를 열었다. 지금도 그 시집 ‘단주(丹主)’가 전한다(현재 포천문화원 역사박물관 소장).
특별히 우리가 기억할 것은 송운선생이 ‘율곡(栗谷)의 향약(鄕約)’을 포천 향리(抱川 鄕里)에 맞게 고쳐 만들고 이를 실천했다는 점이다.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고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천궁행’하였다는 점이다. 나라에서도 헌신짝처럼 버린 ‘향약’을 ‘실천궁행’한 것이 다. 향토대학인 ‘대진’, ‘경복’ 대학교의 포천연구소라도 설립, 오영우 송운 선생의 향약 연구가 빛을 발하는 날을 크게 기대해 보기로 하자.
6·25가 발발하여 보성 오씨 문중과 효자 오백주 가문을 떠받들던 노예들이 북괴 남로당원이 되어 북한의 인공정치(人公政治) 부역자가 되어 활동하였다. ‘개천네’, ‘별난놈이네’, ‘달룡네(月龍)’ 등 몇 집이 빨갱이 감투를 쓰고 인민재판을 하고 토지분배(몰수·재분배)를 하였으나 송운댁 즉, 삭령댁은 손 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며 납치, 살육의 참극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송운 일가’였다. 그 후, 정감록에 쓰인 파란 곳으로 파란을 다녀왔다.
평소 마을과 상민, 노예들에게 큰 음덕을 베푼 덕이라고들 하였다. 9·28 북진하는 국군과 UN군 장병들에게 패퇴(敗退)하던 북한 괴뢰 정치보위부원들은 한국의 전·현직 공직가 가족 그리고 유지(有志)들을 마지막 학살을 감행하고 중학생들을 소년의용군이라고 강제 납치 인민군을 한꺼번에 묶어 만들었다. 송운댁도 예외는 아니어서 인민정치보위부원들이 들이닥쳤다. 학살자명단에 ‘오영호’라고 써 있었다. 송운댁 문패는 ‘오영우(吳永祐)’였다. 유식한 보위부 총살조 인솔자는 ‘오영호가 아니라 오영우가 아닌가?’ 평소 오영호라고 송운을 부르던 빨갱이들이 유식한 대장(인솔자)의 착오(?)로 송운 선생은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가 전한다.
송운 슬하에 43세에 행정고시를 합격한 장자(의정부시장) 2자(남양주부군수) 3자(신북면장)등이 있어 다복한 노래(老來)를 보냈다. 일제시 가채리 독립운동가 최면식 선생이 경영하던 서울 신당동 한의원으로 포천 젊은이들을 데리고 상경, 독립정신 교육을 받고 돌아왔다는 얘기가 지금껏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