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암(癌)환자입니다”라는 말을 하기 싫어서 18년간을 정상인(正常人)처럼 살았다. 아니, 동정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이 두려워 침묵 속에서 18년을 살았다는 말이 정답일 것이다.
막내 며느리가 내 안부를 묻는 전화의 대답을 잘못하여 세상 천지에 “김창종이 암에 걸렸다”는 소문이 났다. 완치 후 책을 만들어 투병 최초 3년 이야기를 발표했지만 그 후 15년의 암 투병기를 다시 더 써야만 했다.
로마 신화의 남자의 상징인 느릅나무 다린 물도 먹고 적덕시혜(積德施惠)의 생활은 계속 되었다.
전화를 통한 언시(言施), 표정을 통한 안시(顔施), 점심 잘 사는 사람이란 별호가 생길 정도의 식시(食施), 원고료를 안받고도 글을 써주는 문시(文施)까지도 모자라서 귀한 호두나무 묘목을 사서 무료로 보급하는 식시(植施)에다 무료강연까지… 힘이 닿는데 까지 베푸는 삶을 살았다.
그랬더니 ‘아름다운 글 문학상’도 타고 실향민의 잡지 ‘개성지(송도)’에 재능 기부 명사로 등재되는가하면 사회공헌 가정 40명에 선발되어 국무총리 공관 만찬에 초빙인사로 초대되어 귀빈석에 앉고 감사패를 받고 장관 부인들과 한적(韓赤) 임원들의 환대를 받는 영광을 안고 박수 갈채 속 환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간을 반이나 절단하고, 대장을 90cm나 잘라내고 신장의 돌을 전자(레이저) 총으로 쏴 대고는 죽음의 항암주사를 10회나 맞았다. 항암주사를 월2회씩 5개월 맞으면서 주사실 창 밖 가문비 나무를 바라보며 죽을 날을 기다리며 울었다.
집에서 기르던 화초 42분을 처조카가 운영하는 유치원에 기증하면서 내가 죽은 뒤 내 몸 같이 아끼던 꽃나무들이 나 죽으면 이름없이 버려짐을 예방하였으며, 평소 아끼던 골동품과 책, 고대유물, 조상의 유품을 고향 박물관에 기증하고 암석도 임진=한탄강 지질공원에 기증케 되어 고향 시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으니 내 생애의 마지막 정리는 영상자료(DVD, VCR-T)만 기증 예정으로 남긴 셈이 되었다. 밤이면 저승사자에게 끌려 어둠 속 광야를 걷는 꿈을 꾼지 18년 기적적인 완치 행운을 얻게 되었다.
내 손에서 자란 노년의 제자들은 매년 가을이면 운동회를 하고 운동장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하며 나를 기쁘게 하고 동문의 붕우(朋友)들은 매달 모여 점심을 먹으며 나의 암 투병 18년 완치의 행운을 축하하고 있다.(사적이야기 주언부언 사과드린다)